[Opinion] 조용한 고백 [사람]

그래서,그래서,그래서
글 입력 2019.09.15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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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기가 하고 싶어 무작정 참여한 연극에는 ‘희노애락 나누기’라는 시간이 있었다. 말 그대로 내 인생의 희,노,애,락 중 하나의 감정을 선택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활동이었다. 내 또래보다는 중년층이 대부분이라 고작 스무 해 남짓한 나의 역사보다 긴 이야기를 가진 분들이 많았다.


함께 나누고 싶은 희노애락을 한 번 정리해보라는 감독님의 말에 집에 가서 꽤나 긴 고민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까, 네 가지의 항목을 나누고 이것저것 적어보았지만 말 할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았다. 오래 알고 지낸 이들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들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은 남들보다 조금 특별했던 대학 합격을 ‘희’에 담고 연습을 갔다. 솔직하면 상처받고 손해보는 것도 감수해야한다는 아버지의 오랜 조언을 따랐다. 사람들이 내가 가진 마음의 허물을 내 전부라고 생각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가끔은 털어놓고 싶기도 하니까, 입 밖으로 제멋대로 달아나고 싶어하는 말들을 매번 꾹꾹 눌러 삼키는 것도 고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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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연습실에 둘러 앉아 각자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무런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수 없이 많은 창작물로 희노애락을 접했으니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고 짐작했다. 다른 이들도 나랑 별 반 다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다들 가장 무난한 서사를 골라왔겠지- 무심히 턱을 괴고 허공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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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의 순서가 지나갈 수록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왜, 나에게, 이 곳을 나가면 타인이 될 사람들에게, 당신의 내밀하고 쓰라린 구석을, 나누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차례가 돌아왔다. 충분히 예상되는 반응을 돌려 받았고 나는 안전했다. 누구에게도 약점을 보이지 않았고 깔끔하고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지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깊고 아득한 혼란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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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이토록 솔직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고, 내 마음 속에 섞여있는 원망과 분노, 한탄과 슬픔을 마음껏 뱉어내지 못해 답답했다. 그리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이 오래 지나도 상처는 여전히 그 곳에, 나와 한 몸이 되어 머무른다는 것을 배웠다.


아물더라도 옅은 흉터로, 흐릿한 자국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어른은 어쩌면 허울 좋은 단어일 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3.




무신경한 인간은 상처를 받아봐야 안다. 너도 찢어져야지. 그래 찢어져야지


- 황정은의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 중



나를 꽤 오래도록 지배했던 소설 속 한 문장- 그리고 이 문장이 나를 지배했던 이유를 그들에게 들려주지 못했다.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차마 속 시원히 고백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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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처가 곧 약점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 그 경험, 기꺼이 자신의 얼룩진 마음을 나눠준 이들 덕분에 조금씩 내 가장 연하고 무른 부분을 서툴게나마 글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 날의 경험으로 나는 오래도록 무너져 본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나를 아끼고 아픔을 견디며 아직도 세상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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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그래서,그래서,

오늘도 따뜻한 밥을 챙겨 먹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애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한 문장씩 쌓아

이 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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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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