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창작자와 기획자의 그 모호한 경계에서 : '창작하는 기획자' [문화 전반]

기획자란 무엇인가?
글 입력 2019.09.05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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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작자와 기획자 그 사이



나야말로 창작자와 기획자 그 사이, 모호한 경계에서 부유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창작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서 가시적인 비주얼에 대해 피드백을 진행하고, 고민하는 창작자이고 싶지만 그 이외의 정산, 자금 조달, 커뮤니케이션, 텍스트, 일정 조율 등 그런 일들도 다 하고 싶었다. 사회가 흔히 이야기하는 ‘기획자’의 역할에 속하는 업무들. 둘 중에 하나의 업무만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회에서 그 업무들은 두 가지의 직군으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그래서 스스로가 모호한 정체성을 띠고 있다고 여겼다.


‘창작하는 기획자’ 먹고살기 힘든 창작자들이 자기 PR을 하기 위해 기획을 하기 시작한 그런 사람들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학교에서 배운 게 그런 거였으니까. ‘너네 요즘 작가는 자기 홍보 없으면 그냥 굶어죽는 거야. 요즘에는 작업 활동도 하면서, 자기 작품을 위한 전시를 직접 기획하는 사람들 많아.’ 생각해보면 그 말은 창작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착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창작과 기획을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말이었음을, 이제야 느껴본다.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거렸던 고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오랜만에 서점을 갔다. ‘예술 경영’이라고 정직하게 쓰인 책 표지 안을 들여다보니,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예술가들은 오랜 수련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실현하고자 한다. 당신의 시답잖은 비평 따위 들을 시간이 없다. 예술 경영은 예술가의 현실적 한계를 해결하여 예술가의 이상이 현실에 뿌리내리고 성장해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무슨 책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저런 뉘앙스의 글이었다. 언제부턴가 예술 경영에는 ‘예술’이 없고 ‘경영’만 남았다.


종합해보면, 무언가 사회에서 창작자는 기획에 참여할 수 있지만, 기획자는 창작에 참여하기 어렵다고 다들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기획자에게 창작은 넘어서는 안되는 선 같은 것이라고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창작자와 기획자는 어떤 관계성을 띄고 있는가. 도대체 넘어서는 안될 선이라는 게 어디에 있으며, 그 선은 어디서부터, 누구로부터 규정된 것인가. 그렇다면 이 질문 먼저 해야겠다. 도대체 ‘기획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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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작하는 기획자



이번 프린지 페스티벌은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포럼을 내어 놓았다. 포럼에서는 새로운 판을 꺼낸다. ‘창작하는 기획자’는 창작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 기획자를 새로이 규정해보는 시간이다. 이는 굉장히 흥미로운 얘기다. 기존에 기성세대들이 획일화한, 사회가 통상적으로 사용해오던 ‘창작자’와 ‘기획자’의 기준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이야기들이다.


이 포럼의 주최자인 토파앤다아 남현욱 역시 이렇게 운을 뗀다. ‘어떤 기획자는 예술의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예술 기획자는 예술과 분리된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저처럼 기획과 창작을 동시에 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기획자도 창작할 수 있음을 전제해놓고, 이번 포럼의 제목처럼 창작하는 기획자는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나갈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두가 ‘기획자’를 규정하는 울타리의 모양이 다르다. 인상 깊었던 말들이 정말 많았는데, 그중 몇 가지만 꺼내보겠다.


‘제가 생각하는 기획자라는 건 무언가 시작하려는 사람, 계획을 해서 어떤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사람이에요. 실행해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팀원들이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일정 관리 등 다양한 일에 함께 참여했을 텐데, 그렇다면 내가 처음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고 해도 나 혼자 ‘기획자’라는 이름을 쓸 수 있을까? 기획자 한 명이 있다기 보다 이건 공동 기획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기획자가 처음과 끝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정산을 다 했다고 업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 무엇을 아카이빙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 그리고 끝난 후에도 피드백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사람이 기획자라고 생각합니다.’



 

#3. 기획자라는 이름 아래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획자의 이미지는 어떠한 것인가. 제안서나 기획서를 공장처럼 찍어내고, 그 기획서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던져버리는 사람. 또는 정산을 하고 돈 관리를 하는 사람.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기획자는 다르다. 포럼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던 이야기는 ‘기획자’라는 용어를 좀 더 세분화하자는 의견이었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 속에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퉁쳐서, 기획자에게 맡겨지는 임무로서만 사용되는 건 배제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어요.’


‘용어 사용을 세분화 시키려는 시도는 중요한 것 같아요. 모호한 개념 하나가 기획자 한 명을 착취하게 되니까요.’


‘공통의 이해를 가지려면 계속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프로덕션이 시작하기 전에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식으로 계속 고민한다면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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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술에서의 창작자와 기획자



‘극단의 경우 보통 공을 연출이 가져가요. 연출의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거예요.’


‘유일무이하고 대체불가한 단 한 명의 예술가라는 환상은 출판 업계에서도 상당해요. 책 한 권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작가 한 명의 기여도가 강조돼요. 그 안에 작가 외에도 마케팅팀, 편집자, 교열, 교집 팀이 있거든요. 그렇지만 이들은 창작에 개입하면 안 되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거죠.’


포럼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거의 공연 연출이나 공연 기획 분야에서 뛰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주로 공연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후반부에 공연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미술 쪽에 훨씬 많은 관심들을 가져왔으므로, 미술계 흐름 속 창작과 기획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미술이야말로 기획자와 창작자가 완전히 분리된 구조가 아닐까 싶다. 미술에서는 흔히 기획자보다는 ‘큐레이터’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과거의 큐레이터를 떠올리면, 작가의 창작 과정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으며, 캡션이나 도록 작업에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으며 텍스트를 완성해나가는 식이다. 내가 ‘과거’라고 지칭했지만 사실 ‘현재’ 큐레이터 업무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것저것 큐레이터 관련 책들을 찾아보면(물론 쓰인지 오래된 책이긴 하다만) 거의 다 ‘고집이 세고, 예술 세계가 확고한 작가의 작업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뉘앙스의 말들이 적혀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 같은 경우 대부분이 개인 작업을 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스스로 여러 난관들을 헤쳐나간다. 그 중간에 누군가 아이디어 관련한 피드백은 줄 수 있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틀어버리도록 강력히 설득하거나, 타인의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만져진 부분들로 작업이 완성된다면, 그 작업을 완전한 본인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요즘의 ‘기획 전시’라고 불리는 것은 말 그대로 기획자의 역할이 좀 더 큰 전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미술관의 전시는 대부분이 기획 전시이며, 과거와 달리 기획자와 작가가 가깝게 소통하기도 한다. 잠시 봉사의 일종으로 일했던 미술관 큐레이터님께 관련된 이야기들을 조금 엿들을 수 있었다. 2019 소비 트렌드 키워드를 주제로 기획된 전시였다. 이 경우, 큐레이터가 작가에게 주제에 맞추어 작품을 완성시켜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나는 큐레이터 실무 경험이 없으므로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지식임을 미리 밝힌다.) 작가들은 그런 요구에 대해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요즘에는 큐레이터가 기획하고 그에 맞는 작품을 요청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작가들은 무언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작업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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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커뮤니티 아트



현대에 와서 큐레이터와 작가의 관계가 좁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 전시’는 여전히 구분과 경계에서 출발한다. 기획자가 작가의 작업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이디어 제안과 작품 창작 과정에서 완전한 협업을 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사례는 없을까? 미술의 세계가 무궁무진함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창작자와 기획자가 밀착되어 있는, 그러니까 창작자와 기획자가 공동으로 활동하는 형태도 있다.


‘커뮤니티 아트’, ‘공동체 미술’, ‘사회참여 미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박물관의 죽어 있는 예술과 상반된 것으로 화랑이나 무대라는 상황을 벗어나 예술행위를 구체화하고, 사회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 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욕구를 가진 일군의 예술가들의 활동. 공동체 예술가들은 특정 예술 형태들 사이의 특성을 초월하여 거리의 무대, 비디오, 벽화, 교통수단, 기구, 놀이 구조 따위를 이용한 보편적인 매체 접근 방법을 쓴다.



‘커뮤니티 아트’는 ‘공동체 미술’이라고도 하는데, 지역 커뮤니티의 비미술적인 요소와 작가가 가진 미술적 요소의 아이디어를 결합시키는 사례를 의미하기도 한다. 미술관 같은 제한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로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지역을 찾아가 그곳에 새로운 예술 문화를 만드는 사례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경우 여러 사람과 협업하여 하나의 작업물을 만드는 과정이므로, 창작자와 기획자가 서로 개입하고, 영향을 주는 작업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커뮤니티 아트’ 또한 그 형식이 고착화되어 있고, 그로 인해 키치라는 비판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창작자와 기획자의 경계와 구분 없이, 그리고 미술관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이 아닌, 좀 더 직접적으로 사회에 개입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분야라고 생각한다. 미술이 이제껏 변화해온 것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형식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전에 없던, 아주 새롭고 재미있는 예술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새로움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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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계



생각해보면 ‘기획자’의 의미는 정말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가 가진 의미 또한 변화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술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서 기획자와 창작자는 일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업의 형태 또한 달라질 것이다.


이 둘의 관계성은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겪었을 일종의 ‘딜레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위기와 혼란이야말로 새로움을 창조해낼 자양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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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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