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변주는 반복 속에서, 패터슨 (Paterson, 2016) [영화]

우리는 이 반복되는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글 입력 2019.08.3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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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반복이 거듭된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씨는 (이것마저 반복이다.) 직업이 버스운전기사이다. 매일 아침 알람 없이 6시에서 6시 30분 사이에 일어나 시계를 확인하고, 아직 덜 잔 여자친구에게 뽀뽀를 해주고 침대 옆 의자에 가지런히 개어놓은 작업복을 입고 시리얼을 먹는다. 출근을 해서는 매일 같은 경로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서 운전한다. 퇴근 후엔 저녁을 먹고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반려견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가고 바에 들려 맥주 한 잔을 한다.


변화는 반복에서 비로소 일어난다. 나는 여기서 비로소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비로소는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전까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던 사건이나 사태가 이루어지거나 변화하기 시작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반복 없이는 변화를 느낄 수 없다. 일상이 있어야 여행이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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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이를 말하고자 하는 단서들은 수도 없이 많다. 상징적으로 쌍둥이가 곳곳에서 등장하는데, 쌍둥이는 외양은 비슷하지만 그들의 내면과 속 사정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패터슨의 일주일은, 비슷하게 흘러갔지만 또 전혀 다르기도 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걸어 회사로 가는 패터슨은 어제와는 다른 날씨의 변화를 느낀다. 어제와 같은 경로를 운행하지만, 오늘의 승객은 달라지고 그에 따라 패터슨의 귀에 들리는 말들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어제는 허리케인 카터가 유명한 복서였다는 것과 그가 패터슨 시에 살았다는 것, 감옥에 수감되었었단 사실을 알게 되고 오늘은 어느 대학생들이 무정부주의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패터슨은 여자친구가 직접 제작한 흰 바탕에 수도 없이 많은 동그라미를 그린 커튼에서 동그라미의 크기가 다 다른 것이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즉 반복되는 패턴에서 다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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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렁인다. 매일 상 위에 놓여있던 특별할 것 없는 성냥을 보고는 문득 시상이 떠오른다. 영화에서 이에 대한 연출이 돋보였는데, 패터슨이 성냥을 바라보는 장면을 보여주고, 성냥을 보며 했던 생각을 곱씹으며 폭포의 이미지 위에 패터슨이 만든 시가 써내려진다.


상 위에 놓인 성냥으로 시상이 떠오르고, 폭포처럼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물밀려 내려오고, 패터슨은 물밀려 내려온 것들을 곱씹으며 읽고, 종이에 적어 내려간다. 일상에서 떠오르는 영감에 대해서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어, 여기 이런 게 있었나? 익숙한 내 방에서 언제 놓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하곤 한다. 그 물건은 다른 것들처럼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똑같이 놓여 있었겠지만 인식한 뒤로는 전혀 낯선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일상에서 이런 것들은 종종 영감을 일으킨다.


영화에서 보여주듯 영감은 다른 것이 아니라, 관찰과 의미 부여에서 시작된다. 예컨대 마포구 합정동과 영등포구 양평동 사이를 연결하는 한강 다리인 양화대교는 자이언티가 노래를 만든 이후로는 아버지와 자식이 건너는 애달픈 다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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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이 운행하고 있던 버스의 시동이 갑자기 꺼져버리는 사고가 발생하고, 핸드폰이 없는 패터슨은 꼬마 승객의 스마트폰을 빌려 회사에 전화를 한다. 심장이 덜컥 한 하루를 겪은 패터슨은 그럼에도 스마트폰을 사기를 원하지 않는다. 약간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패터슨이 핸드폰을 소지하지 않는 것, 패터슨이 자주가는 바에 티비가 놓여있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패터슨의 시를 더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온도의 변화를 몸소 느끼기 전에 이미 텔레비전에서, 스마트폰에서 다음 주의 날씨까지 선수쳐 말해버리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도 살펴보기 전에 지도 어플을 통해 목적지까지 앞만 보고 직행한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언제든지 원하는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서 어떤 것들이 변화하고 있는지 알 여유가 없다. 아니 필요가 없다. 친구들이 뭐하고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그들의 SNS 계정 검색 한 번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하나의 음악만 고르면 그 음악과 비슷한 혹은 내 취향이라고 생각되는 곡들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편하고 예측 가능한 세상에서 우리의 생각은 얕고 빈약해진다.

인스타그램의 개인 계정에 예술을 카테고리로 해놓은 인플루언서들이 많다. 저렇게 예술을 남발해도 되나 싶었다. 지금 보니 나는 예술을 너무 대단하고 고귀하게 생각했다. 예술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매일 어떤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사진을 찍고 사진을 업로드하고 있다. 음악이 한국에서 허락된 유일한 마약이라는 농담이 있는 것처럼 이어폰 없는 대중교통은 고통스럽다. 주말의 영화관은 매진 행렬을 이룬다. 예술가도 어디에나 있다. 작가, 나도 작가이다. 영감을 얻어 글을 쓰고 있고,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영감을 받는다. 이걸로 돈을 버는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명명 지은 것은 명명 지어진 것일 뿐이다.


세탁소에서 랩을 하는 래퍼와 방과 후 엄마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면서 시를 짓는 12살 꼬마 소녀, 집에서 기타를 뚱땅거리는 패터슨의 여자친구, 버스 운전기사이지만 틈이 날 때마다 시를 쓰는 패터슨. 그들과 같이 우리 모두 가능성 있는 예술가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 나오는 패터슨이 존경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는 실존 인물이다. 그는 패터슨시의 외과의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시를 썼고, 시집 《브뢰헬의 그림, 기타》(1962)로 1963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많은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어려웠다. 이 영화는 특히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기보다는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 다였다. 영화라기보다는 실제 패터슨 씨의 다큐 같았다. 인상 깊은 사건들이 몇몇 나오지만, 다른 영화 속 사건들처럼 아주 극적인 사건은 아니다. 이것은 현실을 대변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혹은 기대하는 것만큼 신기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비슷한 매일이 반복될 뿐이다.


우리는 이 반복되는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감독 짐자무쉬의 답은 관찰과 인식이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른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고, 사실 어떤 비슷한 순간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이동진 평론가는 패터슨에 대해 "시간 속을 유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적인 리듬"이라고 했다. 리듬 속에서 관찰과 인식은 변주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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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월요일로 시작해서 월요일로 끝난다.
차이를 느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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