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스페인,맑음] #13. 여행의 끝

글 입력 2019.08.23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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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月, 바르셀로나, 화창함



외국에 나와있을 때, 한국을 가장 그립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조금 부끄럽지만 나의 답은 가족도, 친구도 아닌 떡볶이다.


먹는 것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원초적이고 강렬함은 알았지만, '요알못'인 내가 한국에서 맛본 신X이나 엽X 떡볶이의 맛을 느끼기 위해 거듭된 연구를 하게 될 정도인 줄은 몰랐다. 말라가에서 보낸 시간보다 보낼 시간이 더 적어진 요즘은 더더욱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한국에 가긴 싫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해외에 6개월 정도 나와 있으면 아무리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음을 알기에 떠나기 싫은 마음을 다독이기 위한 마지막 여행을 시작했다.


교환학생을 온 후로 자주, 그리고 오래 여행을 했다. 하지만 이번 바르셀로나 여행은 다른 여행들보다 특별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닌 첫 나홀로 여행이었고, 스페인의 상징이자 천재인 가우디의 고장을 가는 것이며, 교환학생으로서 하는 마지막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여행이라는 생각에 사소한 것에도 감동받고, 이것저것에 의미 부여를 한 덕일까. 나의 마지막 여행은 색다르고 좋은 경험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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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의 구엘 공원



바르셀로나에서 마주한 가우디의 작품들은 경이로웠다. 수많은 나라에서 여러 성당들을 보면서 한 번도 큰 감흥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조금 달랐다.


아직 공사 중인 성당의 외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들어가 본 내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색색의 창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빛들이 얽히고 설키는 모습을 보며 처음 느껴보는 벅찬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일 수도 있지만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정말 비교 불가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이 아니니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였다면 의견 차이로 가지 못했을 '덜 유명한' 여행지들을 돌아 보고, 힘이 들 땐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잠시 쉬고, 늦잠도 실컷 잤다. 언제든 편하게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조금 쓸쓸했다. 대신, 혼자만의 생각에 파묻힐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그러나, 의외로 바르셀로나에서 한 경험 중 가장 좋았던 건 '동행'을 구한 것이다. 이전에는 항상 교환학생으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기에 오랜만에 새로운 한국인들을 보는 것이 새삼 떨렸다.


"아, 요새 미세먼지 엄청나죠. 이런 푸른 하늘은 정말 상상도 못해요! 날씨는 또 얼마나 춥고요? 롱패딩이 아닌 코트를 입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죠. 으, 정말 돌아가기 싫다."


한국을 떠난 지 6개월이 지나도, 6일이 지나도 돌아가기 싫은 마음은 같았나 보다. 한국은 여전히 변한 것 없이 춥고, 불안으로 가득한 곳이구나 하는 마음에 또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한국에 가긴 싫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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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이 찍어준 나의 모습



여느 동행 모임들이 그러하듯 우리는 여행 마지막 날의 아쉬움을 덜어내고자 핀쵸(꼬치를 꽂은 스페인 음식) 음식점과 시내의 여러 바를 전전하며 밤을 지새웠다. 처음 보았을 때보단 한결 서로가 편해졌기에 좀 더 깊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렇게 술을 벗 삼아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으로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그동안 내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

 

여행에서 만난 동행들은 나를 딱히 어려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직접 이야기하려니 조금 부끄럽지만 오히려 '분위기를 잘 주도한다', '밝다' 등의 칭찬을 해주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처음 만난 사이에 오가는 흔한 스몰 토크처럼 느껴질 이 말들이 나는 좀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알고 있던 '나'는 그 정반대에 서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 초반, 한국에서의 나는 항상 걱정을 달고 사는, 여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하고 있는 바쁜 상태가 이상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땐, 부정적인 생각들이 불안과 함께 밀물처럼 몰려왔다.


이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은 이마에 찍힌 낙인처럼 감출 수 없는 것이라 주변 사람들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나 보다. 처음 나를 본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나를 불편해했으니깐.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분명 당시의 심리적 상태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그랬던 내가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술잔을 기울이며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음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옛날엔 꽤나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는 말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동행들의 반응도 재미있었다. 말라가의 햇살을 느끼며 요양이나 하자고 온 스페인에서 나는 '여유' 뿐만 아니라 '변화'라는 토끼까지 잡은 것이다. 바뀌었음을 한번 인지하니 어떤 것들이 변화했는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말라가의 화창한 날씨 덕인지, 집 앞에 있는 탁 트인 바다 덕인지,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온화함 덕인지, 수많은 위기 상황을 극복해낸 경험 덕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난 훨씬 더 긍정적이고, 여유롭고, 편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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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야경



동행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말라가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좌석에 앉자 쏟아지는 잠과 함께 문득 이제는 한국에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 중 '죽고 싶지만'을 '한국에 가긴 싫지만'으로 대체할 정도였던 내가 말이다!


6개월이 지나 전해 들은 한국은 여전히 미세먼지가 많고, 애벌레처럼 생긴 패딩 없이는 살 수 없으며, 경쟁과 불안이 만연한 곳이었지만 6개월 동안 나는 많이 단단해졌기에 예전과 다르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마지막 여행지라고 생각했던 바르셀로나를 떠날 즈음에야 나는 가장 길었고 사실상 가장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여행을 마무리할 준비가 되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中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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