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것도 아닌 여름의 단상 [사람]

글 입력 2019.07.2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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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돌아왔다. 사계절의 한가운데, 습기와 햇빛이 온 세상을 잠식하기라도 할 것처럼 사물에 스며든다. 그것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대문 밖을 나서면 곧장 땀이 맺힌다. 어깨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빛이 숨막히게 따갑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8월이 되면 습기와 햇빛은 더욱 거칠게 세상을 먹어 치우려 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그것들을 피해 어딘가로 피서를 떠나고, 양지바른 대지 위 곡식이나 과일들은 묵묵히 알맹이를 채우거나 당도를 더해갈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모든 풍경들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가진 나이의 숫자만큼 당신은 이미 여름을 보고 느꼈을 것이므로. 고요히 벌레가 우는 여름밤의 공기를, 습기를 가득 머금은 여름날의 내음을 당신은 이미 피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손끝으로, 혹은 우연히 닿은 시선의 끝으로도 우리는 여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게 여름이 또 왔다. 이제는 좀처럼 계절에 무던한 나도 알아차릴 정도로.




생각 0. 시간이 멈추는 계절



아주 오래전부터, 무더운 여름날은 마치 모든 것을 멈춰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고 생각하곤 했다. 한여름의 열기가 세상을 데우면, 산 것과 죽은 것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것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지쳐 결국 주저앉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덟 살까지 우리 집 부엌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초록색의 구식 냉장고가, 한여름만 되면 괴성에 가까운 소음을 내거나 제멋대로 꺼져버리는 일이 그러했다. 스스로의 무기력함에 지고 마는 한여름의 낮시간에는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내게, 여름은 늘 참을 수 없이 길고 지루했다. 괴롭도록 버텨야만 하는 계절이었다.

 



생각 1. 인생의 한여름, 그저 아무것도 아닌 여름



인생에도 계절이 존재한다면, 아마 나는 세상의 여름과 인생의 여름을 동시에 지나는 중일 것이다. 내게는 쉼없이 움직이고 싶어도 끝끝내 멈출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 계속되고 있다. 초여름이 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을 때가 그 시작이었다. 내 마음의 시간과 인생의 시간 사이에 시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아닌 완전한 취준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시간은 벌써 겨울을 지나 봄으로 향하려 하는데, 진짜 내 인생의 시간은 흐르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더니 이제는 아예 흐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스물에서 서른으로 향해 가는 그 어딘가,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할 이 여름에 가만히 서 있다.


마지막 학기부터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며칠동안 머리를 쥐어짜며 완성한 자기소개서들은 줄줄이 탈락되기만 했다. (지금도 물론 달라진 건 없지만.) ‘연습하는 거야, 처음부터 잘 되는 건 없어.’ 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탈락 소식을 접하는 순간은 늘 생경하기만 했다. 이윽고 취준을 하게 되면 자존감이 바닥나기 마련이라던 친한 친구의 말을 절실히 공감하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출발선 상에 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신발끈을 고쳐 묶을 때부터 양 옆에 보이는 경쟁자들에게 벌써 진 기분이었다. 화려한 학점과 엄청난 스펙,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류 통과조차 안될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취업 정보 카페에 가득했다. 난 여태껏 도대체 뭐 한 거지,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순간들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생각 2. 그런데 왜, 힘든 일은 꼭 한번에 일어날까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이 또 하나의 나쁜 일이 찾아왔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건 우리 가족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일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에게는 책임이 하나 더 늘었다. 아니,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하나씩 책임이 더 늘었다고 하는게 더 맞을 것이다.


곧 소란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의 발생은 가족 간의 소통에도 불협화음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데도 크고 작은 마찰은 늘 생기기 마련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집에 있는 것조차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인생의 큰 고비를 처음 겪는 것이 아닌 데도,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꼭 이렇게 겹쳐서 자신을 괴롭히면 누구든지 이기적인 생각을 해 버리기 마련이다. ‘왜 나한테는 이런 일이, 하필 지금 일어나는 걸까.’ 하는 생각 말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은 급한데 좀처럼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이따금씩 모든 것들이 괴로워지고는 했다.




마지막 생각. 그래도, 이 여름이 지나면



그러던 즈음, 친한 친구의 입사 소식을 들었다. 내 마음도 함께 기뻤다. 나보다 일찍 취준생이 되어 오랫동안 고생해왔던 모습을 옆에서 쭉 지켜봤기 때문이다. 친구가 갑자기 어른스러워 보였다. 자랑스럽기도 했다. 얼마나 준비하는 동안 외롭고 괴로웠을까? 내가 이제 지나가려는 시간들을 모두 먼저 지나갔을 친구를 생각하니 대단해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의 괴로움도 혼자서 견디지 못하면, 이번에도 진짜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들보다 조금 더 다른 곳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필요가 있을까.


나보다 훨씬 더한 시련을 어딘가에서 피부처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에 비하면 나의 시련은 너무도 졸렬한 것이 아닌가. 그러자 더 이상 나의 이 여름이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견뎌내지 못하면 시련일 것이지만, 견뎌내고 나면 또 한 번의 기회로 회자될 것이니까.


그렇게 나, 또 다시 사계절의 한복판에 서서 있다. 이제는 마음의 시간과 인생의 시간이 서로 어긋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여름은 기나길 것이고, 언젠가는 분명히 지나갈 것이리라 믿는다. 이 여름, 나는 그렇게 한 번 더 자라고 있는 중이다. 사계절의 한 가운데,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되어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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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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