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모두가 기생충인 시대에, 탈출구를 찾아서 [영화]

글 입력 2019.06.3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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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 ‘기생충’ 이야기


한국의 평범한 중산층이었던 기우네는 아버지의 사업실패 이후 반지하로 몰락했다. 그들은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는다. 국가도, 이웃도, 심지어 스스로조차도 딱히 나서서 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우가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의-대학생, 부유한 여유-친구를 통해 다시 한 번 상승욕망을 품게 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오줌 대신 하늘을 보고 싶었던 그와 그의 가족들은 잠깐의 자유를 맛보지만 또다시 실패하고 반지하로 돌아간다.

사실 그들의 욕망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던 것은 흔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권리, 고요함(소음)-안전(취객)-청결(냄새)이었다. 태어나면서 가진다는 인간의 존엄성이 자연스럽게 무시되는 환경 속에서, 심지어 이미 그것들을 누렸던 자가 느끼는 박탈감은 크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 도덕원칙으로서 당연한 그 말은 누군가에게는 도덕이라는 사치일 수 있다. 그래서 기우네는 잘못된 방법으로 권리를 되찾으려 했고,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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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공감하는 더 올라가고 싶은 욕망,
혹은 좋아지고 싶은 욕망


기생충 속의 인물은 한 쪽이 무조건 나쁜 것도, 마냥 착한 것도 아니며 일방적인 가해자나 피해자도 아니다. 기우네는 인간답게 살아보고자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들은 박사장네와 똑같은 방식으로 문광네를 괄시했다. 문광네는 살아남고자/살리고자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들 역시 기우네에 복수하고자 했다. 박사장네는 그나마 깨끗한 쪽에 있지만 그들 역시 선 아래의 사람들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이는 그들이 그럴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에 용인됐다.

기생충은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라는 대립구도로만 읽기에는 아까운 영화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관객에게 남는 불쾌함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이 이유가 클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히 남의 집에 기생하고 피해를 끼친 두 가족은 잘못했다. 범죄는 범죄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다. 아마 감독이 계속 아무렇지 않아 끼워놓았던 그들의 몰락에 얽힌 배경 때문이 아닐까?

퇴직 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자영업인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있는 돈과 빚을 모아 가게를 차린다. 그리고 망하고 점점 더 안 좋은 환경의 집으로 쫓겨난다. 정말 많이 보았던 광경이고 많이 들었던 뉴스다. 우리사회 대표적인 모습인 ‘자영업의 몰락’을 통해 영화는 실패 이후 일어날 수 없는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노력만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빈부격차, 세대를 거쳐 세습되는 부, 계급상승의 희망이 없는 사다리 등을 말하고 있다. 이 점을 생각하고 기우네와 문광네의 발버둥과 IT로 부자가 된 박사장네의 순수함(?)을 보면 정말 입맛이 쓰다.

노동 소득만으로는 평생 동안 서울에 멀쩡한 집 한 채를 장만하기 힘든 오늘날, 누구나 IT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부동산/주식 투자나 유튜버로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 좁은 사다리가 상승의 유일한 희망이자 탈출구인 것처럼 말하고 믿는다. 왜 우리는 서로를 애써 속이는 것일까?



두 번째 : 영화와 감독에 대한 비평


여러모로 마음에 안드는 점이 있는 영화였다. 가난과 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는 불쾌했고 사건에 대한 아무런 카타르시스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도 인정하는 것은 그가 그려낸 장면들과 마지막에 던진 질문 하나다. 때문에 시사성 측면에서 5점 만점에 5점을 내민다. 영화 속 모든 서사와 플롯은 이 질문을 위한 것이었다. 워낙 논란이 많았던 영화이니 만큼 이 영화를 읽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우리 시대의 탈출불가에 대한 쟁점으로 보았다.

내가 생각한 영화 및 예술의 가치는 이렇다. “왜 지금 이것이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시대에서의 가치가 생긴다고 본다. 그렇다면 ‘기생충’은 왜 있어야 했을까? 감독은 기우의 꿈이 깨지는 장면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며 대답했다. “지금의 시대는 잘못되었다”라고.

사람들의 꿈이 하나둘 깨진지 오래인 지금,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미래보다 그저 살아남는 오늘을 바란다. 3가지를 포기하던 것이 점점 늘어서 이젠 n포로 퉁치고, 타인을 이해하는 힘든 일 대신 쉬운 약자혐오로 향하고, 늘상 있었던 세대 간의 갈등은 어쩐지 부딪히는 것도 포기한 채 가능한 서로를 무시하는 것 같다.

‘기생충’은 조금은 극단적으로, 캐릭터를 단순화하고 대신 서사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며 지금의 모습을 극화한 것 같았다. 범죄를 소재로 한 일반적인 갈등구조지만, 끝이 났을 때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 때문이었다. 시작은 범죄코미디로, 끝은 범죄스릴러로 바뀌며 즐거운 장르적 변용이 일어났지만 그 어디에서도 관객의 기분은 풀리지 않는다. 어딘가 꺼림칙했던 느낌은 지하가족의 등장과 함께 심화되고 결말부에 이르면 끝없는 수렁에 빠진다.

코미디영화였다면 해피엔딩이 있었을 것이고 스릴러영화였다면 탈출의 장면이 있어야 하는데 기생충은 이를 무시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지점에서 사실상 더 나아가기를 멈춘 것이다. 그는 더 말하지 않는다. 아마 못하는 것 같다. 대신 우리에게 묻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메시지전달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보통 인물의 행동이나 사건의 결말을 통해 간접적인 암시를 주고 또 그래야 하는데, 손을 놔버리다니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의 의도대로 말리게 되는 것은 감독이 답을 내기를 포기한 대신 잔인할 정도로 세심하게 판을 구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판을 지하-반지하-지상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메트로폴리스로 보았다. 지하 vs 지상의 이분법적이었던 과거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반지하가 추가되자 마음 편히 선악을 갈라서 볼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어정쩡한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 반지하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무대 위를 지켜보던 관객에서 얼결에 끌려 나와 배우로서 나타난 우리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가난하지 않았던 기우네-우리들이, ‘자수성가’한 박사장네를 꿈꾸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들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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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영화 속 반지하방처럼 확연히 주거가 열악한 곳에 살지 않아도 많은 우리들은 정신적 반지하에 시달리고 있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혹여 값이 떨어질까, 집주인이 전세금이나 월세를 올려달라고 할까봐 전전긍긍하고 대학에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는 자신, 혹은 자식의 현실에 한숨 쉰다.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성별, 계급, 나이, 세대 등을 막론하고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다.

불안함은 공포를 낳고 그 공포는 주위를 끌어들이며 밑으로, 더 밑으로 떨어진다. 위도, 아래도 아닌 곳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애써 아래를 외면하며 위를 추앙하거나 위로 가기를 갈망하지만 현실은 다같이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한 줌 남은 수직의 사다리가 끊기는 지점에 다다르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겐 내일을 위한 새로운 질문이 필요하다. 새로운 답을 낼 수 있는 새로운 질문, 다음 시대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감독의 물음에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잔혹하게도 그 꿈을 기우의 상상을 통해 터뜨리면서 탈출불가를 외친, 그의 질문에 대해서 말이다. 국가도, 자본가도, 누구도 단숨에 해결할 수 없는 이 시대의 굴레에서 마냥 순응하며 리스펙하거나 그저 언젠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대신 지금 내가-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세 번째 : 나의 이야기, 제도와 개인


아마 영화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영화 속 세 가족의 끝이 그래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두 악당이 아니었음에도 서로에게 나쁜 사람이 되었고 가족 간의 재회는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남았다. 몽상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결말은 어딘가 익숙했고 그것이 우리 현실의 모습임을 상기했다.

당장 먹고사는 것이 급하고 현실의 불안정함에 흔들리는 나에게,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다음을 말할 수 있는 힘이 있을까?

5월에 영화 ‘기생충’을 보고 정말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의견도 나누었다. 한 곳에서는 이런 얘기가 나왔다. ‘사람마다 가능성이 다른 출구’, 그리고 각자의 해답에 대한 열띤 목소리가 있었다.

누군가는 예술, 누군가는 버티기, 누군가는 사회변혁을 말했다. 나는 개개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씨앗으로 교육을 말했다. 나 혼자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더 사회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운동이 있다면 역시 교육이지 않을까 했다.

나는 부유하다고 농담으로도 말할 수 없는 집에서 자랐고 영화와 같은 반지하와 언덕배기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기우네는 중산층으로 살다가 몰락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 밑바닥이 익숙했다. 당시 IMF가 막 지난 시기라 여기저기 다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고 가난이 딱히 큰 가난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왜냐면 다 비슷했으니까. 그러나 조금씩 자라면서 지금까지 만났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있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며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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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언덕배기


나는 가난이 부끄러워졌고 어떤 원한과 분노와 좌절에 시달렸다. 때로는 몽상의 세계로 도피하기도 했다. 마치 기우처럼. 그러나 그렇게 흔들리고 힘들어하면서도 대학을 갔고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여전히 세상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그 움직임에 맞추어 아등바등 살아오면서, 분명 달라졌다.

그래서 모임에서 쟁점이었던 ‘사람마다 가능성이 다른 출구’에 대해 반만 공감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사람은 ‘나’, 자신에서부터 시작하여 변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떤 가시적이고 관습적인 위대함으로 나타나지 않고 고요한 변화일지라도, 그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노력이 부족하다’, ‘개인이 부지런해야 한다.’ 같은 게 아니다. 반은 공감한다고 말했듯, 정말 변화의 단초를 찾기 힘든 환경이 있다. 나만 하더라도 나에게 있었던 여러 감사한 조건들, 기회들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그리고 슬프게도 타인을 바꾸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폭력과 세뇌로 인형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결국 변화는 자기 자신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옳게 살아감으로써 자극을 주는 것, 그리고 나이, 재산, 성별, 지역에 상관없이 교육의 기회가 고루 닿을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봉준호가 물어본 ‘다음’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그리고 어설프게 세상을 바꿀 방법을 제시하기보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컷 떠들며 찝찝한 감정을 해소하는 것으로 끝나고 싶지 않다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인 제도, 법, 공동체의 활용은 그 다음의 문제일 것이다. 이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시작점의 문제이다.

개인은 계속해서 자신에서 시작해서 시대의 탈출방향을 찾는다. 그러나 그가 보는 관점에 따라 허무주의로 빠지거나 여전히 시대의 논리에 따라 되돌아올 수도 있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수단이지만 꽤나 빠르고 강하게 사람의 행동과 습관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속도만으로는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세월동안 우리는 몸으로 느껴왔다.

그렇다면 다음을 향한 출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다음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의지나 제도만으로는 안된다. 먼저 지금을 바르게 보고, 그 틈새에서 다음을 향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삶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이 기이한 현상에서부터 출발하자. 삶을 어떻게 ‘성공했다’고,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부터 의심해야 한다. 살아있으니 살고 있는 우리네의 삶에, 나의 삶에 도대체 누가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지? 그리고 왜 우리는 그 잣대를 선선이 수용하고 그 기준을 맞추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일까.

자신의 삶을 다른 무언가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말자.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감과 여러 감정들을 주의 깊게 보고 왜 그것이 일어났는지, 언제 그러는지 계속해서 살피자.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내가 갖고 있던 도덕 판단들을 점검하고 거부하고 변형시키며 나의 것으로 바꾸자.

그렇게 나로부터 새로운 도덕을 세우자. 사회가, 전문가가, 주위가 전해오는 일방적인 감정과 생각에 대해 판단중지하고 그들의 가치에 대해 다시 평가하자. 시대의 도덕에 대해 의심하고 ‘나’라는 틈새를 계속 넓혀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계속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이후에야 법과 제도에 대해, 구체적인 미래상에 대해 말하고 함께 그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

서로를 죽이는 기생대신, 서로 이익을 보는 공생관계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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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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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하는스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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