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키즈존에 대한 짧은 생각 [사람]

글 입력 2019.06.20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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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의미인 '노키즈존(No Kids Zone)'. 몇 년 전에 등장하여 곳곳에 퍼져가고 있는 노키즈존은 더 이상 낯설거나 생소한 것이 아니다. 노키즈존이 실생활에서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것과 별개로 그것을 둘러싼 찬반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이 논쟁에 관한 내 입장은 찬성에 가까웠다. 노키즈존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으며 정당한 조치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진상 엄마, 즉 요즘 '맘충'이라 통칭되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넷 게시글을 접한 결과였다.


'맘충'은 노키즈존 문제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단어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키즈존 찬성의 근거로 맘충을 들기 때문이다. 맘충(mom+蟲)은 자신의 아이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를 뜻하는 단어로, 카페 혹은 식당에서 기저귀를 갈거나, 그 기저귀를 처리하지 않고 가는 것이 맘충의 대표적인 예이다. 맘충에는 에티켓이 없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담겨 있다. 이 분노와 혐오가 노키즈존으로 이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식당에서 아이에게 벌어지는 사고는 노키즈존에 더 힘을 실어준다. 2015년에 식당 종업원이 식당 내부 통로에 세워둔 유모차에 된장찌개를 쏟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4세 아이가 화상을 입게 되고 법원은 식당 주인의 책임을 70%로 판단했다. 식당 측은 식당 내 유모차 반입을 금지하는 안내문을 게시하여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식당 내 어린이 사고 관련 판결에서 식당이 책임을 일부 지게 되자 영업자는 노키즈존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부모와 아이는 일반 고객과 영업자 모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 고객 입장인 내가 찬성 편에 기울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내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시 인터넷 게시글 때문이었다. 그 글의 내용은 맘충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아이를 데리고 식당에 가면 노심초사 한다는 것이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내 생각이 한쪽의 입장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부모가 에티켓이 결여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부모와 아이를 보는 사회적 시선이 부쩍 날카로워진 것을 알기에, 또한 맘충이 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조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까지도 모두 맘충이라고 불리거나 잠재적 맘충으로 여겨지며 입장을 제한받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고려하지 못한 또 다른 존재는 바로 아이이다. 노키즈존을 시행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로 인해 아이들은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 제약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자신이 일종의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이것은 동화 작가 전이수군의 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전이수군은 동생의 생일날 고대하던 식당으로 가지만 노키즈존이라 입장을 할 수 없게 된다. 식당에 들어갈 수 없었던 그날의 슬픔이 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쯤되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직접 피부로 차별을 느끼고 자란 아이들이 앞으로 사회에서 관용을 베풀 수 있을까?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것이 욕심 아닐까.



어른들이 조용히 있고 싶고, 아이들이 없어야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생각한다.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 하는 그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 어린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는거니까. 어른들은 잊고 있나보다 어른들도.. 그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전이수군의 일기 <우태의 눈물> 중



글을 쓰기 전 어머니께 내 어린 시절을 물어봤다. 어린 시절 식당에 갔었는지, 식당에서 소란을 피우진 않았는지. 장난꾸러기는 아니었지만 울긴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도 누군가의 식사 시간을 정신없고 소란스럽게 만든 적이 있는 것이다. 난 그분들의 배려로 성인이 되어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그렇기에 나도 아이들의 성장을 관대하게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에 고속버스 좌석 뒤를 차던 아이가 떠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배려에는 당연히 부모들의 배려도 동반되어야 한다. 아이가 있다고 상대에게 상식을 넘는 배려를 강요하지 않아야하고 다른 사람이 아이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답은 서로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다. 당장 내일 카페에 갔다가 시끄럽게 우는 아이를 보고 조금은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럴지라도 난 그들에게 날 선 시선을 보내기 보다는 아이를 완벽하게 케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상기할 것이다. 작은 날갯짓이 거센 폭풍이 되길 바라면서.





[정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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