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처음 겪는 것들 [여행]

몬트리올 3
글 입력 2019.05.2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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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좋은 날의 올드 포트(Vieux-Port)


생각해보면 매일이 어제와는 다른 날이고, 비슷한 것 같아도 분명 다른 경험들을 한다. 하지만 늘 같은 환경에 있다 보면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늘 그랬다. 매일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면서도 그게 새롭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 익숙함에 파묻혀 안락하게 지낼 땐 어떤 변화도 만들지 않고 이대로 영원히 머물기를 바란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 변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개인의 의지력만으로 변화가 어렵다면 환경을 바꿔보라고들 한다. 어쩌다 합격한 워킹 홀리데이였지만, 분명 내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답을 알 수 없던 그 당시의 내가 상상했던 대로는 아니지만-사실 어떤 구체적인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분명 이곳에서의 생활은 처음 겪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확실히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다.



1. 한밤의 슬로우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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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자 한가운데에 그려진 단풍잎이 어이없지만 귀엽다


한국에서는 솔직히 맥도날드에 잘 가지 않았다. 서울에 살 땐 버거킹을 좋아했고 제천에 가서는 맘스터치를 주로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캐나다에서도 "맥도날드에 꼭 가봐야겠다!" 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한국에도 많은데 굳이? 이 날 맥도날드에 간 건 정말 말 그대로 충동이었다.

외국은 밤에는 위험하니 돌아다니지 말라는 엄마의 걱정을 뒤로하고 집 앞 공원에 나간 것도, 길이 난 대로 쭉 걷다가 40분이나 직진으로 걸어간 것도, 밤 10시에 배고프다고 구글맵에서 먹을거리를 찾은 것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24시 맥도날드에 들어간 것도. 치킨이 너무 그리워서 치킨버거를 시킨 것까지도 모든 게 선택의 순간에 가장 끌리는 것을 선택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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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시간 10시 41분 - 수령시간은 11시 35분


밤 10시가 넘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가게 안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카운터 옆으로는 배달 직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달 직원들은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고, 자기 번호가 불리면 얼른 넘겨받아 바쁘게 사라졌는데, 맥딜리버리 크루라기보단 배달 대행업체 직원처럼 보였다. 이 시간에도 배달을 시켜먹는구나. 프랑스에서는 일곱여덟시가 넘으면 온 거리가 잠에 빠져든 느낌이었는데, 몬트리올에는 자정무렵에도 심야버스가 돌아다닌다. '서양'이라는 테두리에 넣어 생각하기에는 여러모로 미주와 유럽이 다르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한국 맥도날드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기계로 주문을 넣고 번호를 받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팠던 터라 들뜬 마음으로 번호표를 손에 쥐고 휴대폰을 하며 중간중간 전광판을 올려다보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번호가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나갔나 생각하기엔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도 다들 아까 그 얼굴 그대로다. 그걸 알아채고 나니 슬슬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디까지나 프랑스와 비교해 빠른 거지 우리나라 상식으로 생각하면 곳곳에서 클레임이 터질 상황인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으면 솔직히 짜증이 조금은 올라왔을 텐데 외국에서 이러니 재미있기만 했다. 이럴 때 '오! 외국은 외국이구나!'를 느껴서 그런 걸까.

전광판에 내 번호가 나오고도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음식을 받았다. 뒤에 서 있으면 영원히 안 줄 것 같아서, 앞 사람들이 슬슬 음식 받아서 테이블로 돌아가고 난 후 카운터에 달라붙어서 직원들에게 번호가 보이게 주문서를 들고 기다렸다. 마치 공항에 픽업나가 이름표를 들고 줄줄이 서서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이걸 패스트푸드라고 부르는 건 정말 역설적인 일이 아닐까? 전혀 패스트하지 않은데. 1년 동안 이렇게 살다가 한국에 돌아가면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지려나.



2. 차고 세일(Vente de Ga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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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켤레당 5달러.
거의 새것 같은 신발을 두 켤레나 구매했다.


돌아오는 월요일이 캐나다 공휴일인 빅토리아 데이라서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까지 3일 반을 내리 쉬는, 캐나다의 황금연휴. 토요일 점심에 다운타운에 나가려고 길을 나서는데 집집마다 차고세일을 하고 있었다. 순간 너무 흥미로워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정말 교과서에서나 배우던 바로 그! 프랑스에서도 경험해본 적 없는!
 
물론 프랑스에 차고 세일 개념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름이 조금 다른데, 이것도 각자의 문화에 기반한 거라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미국과 캐나다는 비교적 신식 건물들이 많고, 한창 자동차가 등장한 후에 지어진 집이 많아서인지 주택가를 돌아다니다보면 집집마다 차고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 옷장과 창고를 정리하며 나온 중고물품을 파는 걸 차고세일(garage sale, vente de garage)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유럽에는 마차 시절에 지은 건물이 더 많고, 그런 오래된 건물들에는 대부분 차고가 없다. 대신 프랑스에서는 그런 추억의 물건이나 오래된 골동품을 다락방에 보관한다. 그래서 똑같이 시즌을 맞이해 다락방을 비워 중고물품을 파는 것을 다락방세일(vide grenier)이라고 부른다. Vider는 '비우다'라는 뜻이고 grenier는 말 그대로 다락방이다. 나는 한 학기 동안 프랑스에 있으면서 매주 열리는 장터는 가봤지만 다락방세일은 아쉽게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날! 처음 경험해보는 차고 세일에서 꽤 마음에 드는 것들을 저렴하게 구매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짐을 줄인다고 운동화 한켤레 구두 한켤레만 달랑 들고 온 탓에, 언젠가 신발을 사야 하긴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신은 테가 거의 안 나는 새것 같은 신발을 두 켤레나! 게다가 꼭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원체 옷 쇼핑을 잘 안 하는 탓에 어릴 때 이후로는 장만해본 적 없는 청재킷도 단 돈 3달러에 획득했다. 덕분에 한국에서라면 시도하기 망설였을 청청청 룩으로 기분좋게 하루종일 다운타운을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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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패션 센스는 포기한 사람의 청청청 패션



3. 오프라인 이력서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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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레터 대신이라고 이력서에 끼워 낸 그림들


사실 구직활동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는 않았다.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그곳에만 이력서 수정해가며 세 번을 지원했는데 연락이 통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도 크게 마음에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설렁설렁 구직사이트를 돌아보며 한두 군데 이력서를 넣다 보면 주위 사람들이 구직활동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묻곤 한다. 본인들의 경험에 의한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한인교회를 통해 한인사회와도 가까이 있다보니 일을 추천받은 적도 두어 번 있었다. 딱히 끌리지 않아서 결국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놀며 지내다가 정말 탈락 메일을 받고 나서야 이제는 때가 되었다며 두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을 정했다.
 
사실 전부터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 아르바이트를 꼭 해보고 싶었다.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과 어울리는 게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림연습도 한창 하는 중이니 친해지면 그림도 선물해주고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구직사이트에 '호스텔'을 키워드로 검색해봤는데 딱히 구인중인 곳이 없었다. 원래 검색능력이 패션센스 만큼이나 0에 수렴하는 사람이다보니 그냥 지원의 방향을 바꿨다. 구직활동 중에 가장 많이 들은 조언 중 하나가 온라인 지원보다는 오프라인 지원이 잘 통하니 이력서를 수십장 인쇄해서 아무데나 뿌리고 연락이 오는 곳에 면접을 보라는 것이다. 수십장씩 하기에는 돈이 아깝기도 하고 그만큼 돌아다니는 게 귀찮기도 해서 나는 딱 열 장만 인쇄했다. 그리고 부킹닷컴에 몬트리올내 호스텔을 검색해서 마음에 드는 곳 딱 두 군데에 지원했다.

방법은 단순했다. 그냥 마음에 드는 호스텔 앞에 가서 한 시간 정도 호스텔 외관을 그린 후에, 당당하게 들어가서 프론트까지 간 뒤, 잔뜩 수줍어하며 이력서를 내밀고, 일을 구하는 중인데 매니저에게 이력서를 전해달라고 한다. 나는 내가 파워넘치게 웃으며 지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친절한 직원의 서비스 스마일을 마주하고 서니 조금 작아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미 그림을 그리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 구인중인 것도 아닌데 괜히 나대는 건 아닐까, 그림은 또 무슨 오그라드는 갬성인가. 아니야, 그래도 안 해보느니 해보자. 떨어지면 다시 얼굴 볼 사이도 아닌데 한 번 이력서나 내보지 뭐. 그렇게 없는 용기 짜내서 지원했는데 직원들이 상냥하게 받아주니 긴장이 확 풀렸고, 두 번째 호스텔에서는 마침 구인중이니 매니저에게 전달해주겠다는 답변까지 받아냈다.

그래서 두 곳 중 하나에 붙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둘 다 떨어지고, 아무 생각없이 경력직으로 지원했던(무려 2년 경력) 카페 아르바이트에 합격해버렸다. 사장님도 정말 해맑고 친절하시고, 매니저랑 동료 직원들도 상냥하고, 일 자체도 워낙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금방 손에 익었다. 샌드위치 메뉴가 너무 많아 아직은 헷갈리지만, 그 외 일들은 어느정도 숙지한 것 같다. 걱정했던 불어로 주문받기도 순항중이다. 아직은 트라이얼 근무까지 합해도 고작 이틀차인 신입인데다, 근무자가 넉넉한 편이라 시프트가 많지 않아 급여는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도 방세와 통신비, 교통비는 자력으로 해결 가능할 것 같아 만족스럽다.
 
그리고 또 하나 만족스러운 점은, 1번 호스텔에서 내 그림을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려 자랑한 것이다. 예쁜 선물을 받았다며 올라온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력서는 걷어 찼으면서!'하고 잠시 푸념하긴 했지만,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재미있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이미 만족스러운 일을 구했기 때문에 더 여유로운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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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에는 전면 유리창으로 된 건물이 많은데,
맑은 날에는 하늘이 그대로 비쳐서 정말 예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은 이제 익숙하다. 하지만 요즘들어 그 말이 더 마음깊이 와 닿는 것 같다. 캐나다에 오기로 한 것도, 그 중에서 몬트리올에 오기로 한 것도 내 선택이었지만 뚜렷한 주관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괜찮을 것 같으니까. 지낼 곳을 구할 때까지만 해도 두 집 사이에서 선택을 못해 한국시간으로 새벽 댓바람부터 부모님과 친구에게 의견을 구했다. 마음에 끌리는 곳은 있었는데 그 장단점이 서로 확연하게 다르다보니,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는 게 부담스러웠고, 내가 이렇게 선택했다고 말했을 때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왜 그랬어. 나라면 다른 옵션을 선택했을 텐데' 하는 말을 들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지내보니 오늘 아침에 뭘 먹을까 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외출을 할 건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낼 건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모든 게 다 선택의 연속이었다. 하나씩 하나씩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다보니 조금씩, 아주 조금씩 '주관'이라는 게 생기는 것 같다. 그 '주관'을 의견으로 표현하는 것에도 차차 익숙해지는 중이다.

잘 하고 있다고, 오랜만에 나 자신에게 진심어린 응원을 해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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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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