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NewPhilosoper 06 : 당신의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 자유인, 시계 없이 흘러가는 나날을 향해

글 입력 2019.05.16 02:3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자유인, 시계 없이 흘러가는 나날을 향해


[ NewPhilosoper 06 : 당신의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NP_6_표지.jpg
 

"'시간'은  먼저 '하늘'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시간을 발견하는 장소가 바로 하늘이다.
그래서 '시간'은 심지어 하늘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마르틴 하이데거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요즘이다. 곧 아르바이트에서 자유의 몸이 되긴 하지만 오전에 학원을 다니고 외부 활동 2개를 진행하고 2-3개 활동을 더 준비하는 등 신경 쓸 일이 너무나 많다. 가뜩이나 체력까지 약해져 스트레스 폭발 정신이 사나운 요즘, 며칠 전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유럽에 교환학생을 갔을 때조차 '유럽에서야 하늘을 볼 수 있다던' 친구들 사이에서 꿋꿋이 한국에서도 하늘을 자주 보았다 외치던 나였지만, 요즘은 문자 그래도 고개를 꺾어 위쪽을 올려다 볼 여유 조차 없었다.


0.jpg


'하늘을 본다'는 건 인위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을 느끼는 행위다. 사람들이 만든 제도의 틀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순간.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늘을 보면서 사색을 하고 여유를 찾는다 말한다. 결국 그 순간 자체가 인위적인 시계의 속박을 벗어나 자신의 리듬으로 흘러가는 주관적인 시간을 체감하는 유일한 순간이기에 우리는 하늘을 보며 지친 일상을 다독인다. 그리고 이렇게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시간 리듬을 회복할 때에만 사람들은 사색의 여유를 가진다. 사유란 결국 몸과 마음이 중심을 잡고 단단히 바닥을 디딜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래의 나는 도통 이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시계를 보지 않고 만끽하는 순간들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한 달 전 쯤이었을 테다. 다이어리에서 마지막으로 본 '여유'라는 글자가 한 달전이었으니. 나는 기본적으로 인위적인 시간리듬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유롭게 흘러가며 생동하는 사고의 흐름은 시간의 압박을 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 최소한의 일상 패턴을 유지할 규칙만을 선호하는 편이다.


카드2.jpg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포함해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인공적인 시간의 압박 속에 살고 있다. 근대 사회부터 현대 사회까지 사람들은 꾸준히 '시간의 흐름'을 사유하고 의미를 부여해왔으며 이 의미 변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시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사회가 정의한 객관적인 시간(인공적 시간), 개인의 흐름으로 흘러가는 주관적 시간(자연적 시간)은 사회의 형태에 따라 엎치락 뒤치락 비중 싸움을 해오며 공존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며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도입부가 무척 거창해졌는데,

결국 '시간과 사회, 개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NewPhilosopher : 일상을 철학하다



로고.jpg
 


《뉴필로소퍼》는 인류가 축적한 웅숭깊은 철학적 사상을 탐구하여 “보다 충실한 삶”의 원형을 찾고자 2013년 호주에서 처음 창간된 계간지다. 《뉴필로소퍼》의 창간 목표는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으로, 소비주의와 기술만능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뉴필로소퍼》가 천착하는 주제는 ‘지금, 여기’의 삶이다. 인간의 삶과 그 삶을 지지하는 정체성은 물론 문학, 철학, 역사, 예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인문적 관점을 선보인다. 인문학과 철학적 관점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독립성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2013년 창간 당시부터 광고 없는 잡지로 발간되고 있다. 《뉴필로소퍼》 한국판 역시 이러한 정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일체의 광고 없이 잡지를 발간한다.



2.jpg



'일상을 철학하다'라는 명제로 발행되는 잡지 뉴필로소퍼 6호는 일상생활과 사회, 시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철학과 사유, 사유와 여유는 떨어질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결국 철학 매거진이 철학의 존립 필요조건인 시간에 대해 탐구하는 셈이다. 전반적으로 다양한 소재의 글과 독특한 일러스트들 주제에 맞게 짜여진 삽화나 단어 모음집, 명언, 고전 등 알찬 구성으로 꽉 짜여있다. 광고가 없다는 점은 매거진으로서는 신박한, 파격적인 구성이기도 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존에 철학에 대한 관심이나 공부를 한 적이 없는 이들이 처음 맞딱뜨리기엔 장벽이 약간 높은 느낌이다. 구성의 3분의 2정도가 해외 글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번역체와 현학적인 표현들은 다소 독자들을 주춤거리게 만들 수도 있다. '철학은 원래 그런거야'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일상을 철학하다'라는 명제에 비해서는 다소 대중성을 확보하긴 힘들지 않을까 한다. 물론 아직 초창기이기에 조금 더 지켜봐야하겠지만.

개인의 특성과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번 6호의 내용 중 일부가 확실히 나를 '철학'의 세계로 끌어들이는데는 성공했다. 1학년 때 한창 읽던 철학 서적들을 꺼내서 조금씩이지만 일부를 읽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현재의 나는 과도기에 있다. 시간을 화폐로 교환하는 단계에서 가치를 화폐로 교환하는 고차원의 단계로 건너가려고 한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을 버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리다) 잘 건너 가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적 시간의 속박이 아닌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주체적인 시간을 사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 시계없이 흘러가는 순간들을 자유롭게 만끽할 나날을 꿈꾸며 도대체 왜 내가 이런 목표를 가지게 되었는지, 왜 나와 여러분은 늘 시곗바늘에 쫓겨다니며 시간에 허덕여야하는지, 이 상황을 만든 것들이 대체 누군지 알아보도록 하자.




<In Time>, 시간이 돈이 되는 세상



0-1.jpg
© jcgellidon, 출처 Unsplash


뉴필로소퍼의 6호는 한국판 장동석 편집장의 글로 시작된다. 여러분은 아마 6호를 펴자마자 영화 한 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세상, 영화 <인타임>이다. 이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25살 이후 늙지 않는다. 자연의 시간이 멈추는 것이다. 대신 그들에겐 자연적인 시간이 아닌, 사회가 부여한 화폐 역할을 하는 인공적인 시간이 주어진다. 단 1년, 그 시간으로 사람들은 입고 먹고 살 곳을 찾아야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물리적 시간은 25년 뿐이며 그 이후엔 모두가 노동을 하며 생명을 연장시켜나가야한다.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세상이다. 문자 그대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회는 태생적을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시간 금수저'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먹고 사는 걱정, 이를 넘어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영속의 시간을 편안하게 살아간다. 다른 이들의 삶이 커피 한 잔 값에 멈춰버릴 때 말이다. 영화 <인타임>의 세계관은 잔혹하다.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현대사회에서도 시간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평한 것이지만, 이 곳에선 시간이 곧 돈이 되어 가난을 타고난 자는 생명까지도 멈춰버린다. 얼마나 끔찍한가. 우리가 발 딛은 현실은 저 정도까지는 아니라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정말 다행일까?


카드4.jpg
 

안타깝게도 우리가 발 디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상황이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사회'라면 현실은 '돈이 곧 시간이 되는 사회'다. 말장난 같은 이 문장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이 같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영화에서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은 곧 '돈=시간'으로 이어지지만, 현실에서는 돈과 시간이 같은 개념은 아니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다만 현실에서는 시간이 자본에 종속된다. 현대 사회의 모든 것들은 자본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큰 자본은 더 큰 자본을 부르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자본을 타고난 이들은 조금 더 쉽게 더 큰 자본을 얻을 수 있다.

자본이 시간을 지배하는 상황은 사람들이 시간을 살 수 있기에 발생한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때 우리는 이동이나, 특정한 일을 수행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무궁화호를 KTX로 타면 정확이 시간이 반으로 줄어들고 비용은 2배로 증가한다. 더 많은 비용을 들이면 그만큼 시간을 더 단축시킬 수 있으며, 여유 시간에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즉 돈으로 시간을 사는 셈이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를 보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시간을 팔아 돈을 번다. 돈을 위해 시간을 자본에 반납하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고,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입시 경쟁을 치루고, 끊임없이 경쟁한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이는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셈이다.

결국 태생적 빈부의 차이는 사실 상 사람들이 유용할 수 있는 시간의 크기를 다르게 만든다. 자본을 타고난 이들은 자본으로 시간을 사 더 여유롭게,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그나마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팔아 자본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자본이 스스로 몸집을 불리는 속도다. 자본은 클수록 더 많은 자본을 잡아당긴다. 이때 수치는 정비례가 아닌 급격한 증가값을 가지는데, 이는 정비례로 시간을 팔아 돈을 얻는 행위와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 즉 자본이 자본을 통해 부를 불리는 속도를,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정비례 속도로는 절대로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결국 빈부격차의 심화로 이어진다. 남들이 단순히 시간을 팔아 돈을 벌 때, 타고난 자본을 이용해 시간적 여유를 얻은 이들은 그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 나이가 곧 권력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시간적 여유를 가진 이들은 결국 더 많은 기회를 얻게되고, 이는 빈부의 차이를 더욱 격화시킨다.


물리적으로 주어지는 시간이 같다는 사실 외에, <인타임>의 시간 개념과 현대 사회의 시간 개념은 그리 다르지 않다. '시간은 곧 돈이며, 돈은 곧 시간'이란 전제 아래 타고난 빈부의 격차가 시간의 가용성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이는 다시 기회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며 자본이 크고, 시간 가용성이 높을수록 더욱 많은 기회를 얻는다. 많은 기회를 얻을수록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다. 결국 사람들의 시간 가용성 역시 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에 종속되어, 타고난 부의 크기에 따라 시간 가용성이 달라지고 더 많은 자본을 가진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근대와 현대, 시간을 사유하는 두 가지 방식



1.jpg


시간은 언제부터 돈이 되었나. 이 간단한 물음에는 꽤나 기나긴 여정이 숨어있다. 우선 우리는 근대의 시간 사유방식에 대해 고민해보아야한다. 근대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아이콘은 '기차'다. 기차는 정시성, 즉 정확한 시간에 출발하고 도착하는 시간의 정확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는다. 즉, 근대 사회에서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일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이는 '시간이 곧 돈'이라는 효율성에 근거한 사고방식에 기초한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시간제를 도입했고, 이들의 하루 일과를 철저하게 규제했다. 불필요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없도록, 노동하지 않는 시간은 가치가 없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주입시켰다.

더불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나타난 '시공간 압축'은 실제 시간과 공간의 크기보다 시간을 더 빠르게, 공간을 더 좁게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즉 기술의 발전으로 특정한 행동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더 줄이고, 이동에 걸리는 시간을 더 줄임으로써 공간적 제약을 극복한 것이다. 이제는 식상한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시공간 압축에 대한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렇게 기술로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한 이후에 남은 시간을 다시 노동에 투입하도록 함으로써 수익성을 극대화 시키고자 한 것이 근대의 사고 방식이다.

정리하자면 근대에 이르러 상업이 주요 업으로 성장하면서 화폐가 가지는 가치는 점점 커져갔다. 화폐는 모든 가치를 동일한 선상에 두고 값을 매긴다. (현재 우리는 이에 너무 익숙해서 자연히 값어치를 돈 단위로 매기기도 한다) 이들은 물체의 개별성을 지우고 하나의 획일적인 기준만을 강조하는데 이는 곧 앞서 언급한 인공적 시간이 자연의 시간을 밀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객관성이 개개인의 주관성을 덮어버린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화폐)가 모든 사물과 행위의 기준이 되고 이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자연히 시간도 이를 따라가게 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화폐 경제와 이성의 지배는 아주 깊이 연관되어있다.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관계는 그들의 개체성에 기초하는 반면, 이성적 관계는 사람들을 마치 숫자를 대하는 것처럼, 즉 객관적으로 평가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화폐경제는 우선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저울질하고, 계산하고, 숫자로 규정하고, 질적 가치를 양적가치로 환원하는 일로 소진하게끔 만들어버렸다. 화폐가 지닌 계산적 본질을 통해 삶의 요소들 간의 관계에서 동일한 것과 동일하지 않은 것을 규정하는 정확성과 확실성, 약속과 협정의 명확성이 지배하게 되었다.

돈은 사물의 모든 다양성을 균등한 척도로 재고,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표현하며,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모든 가치의 공통분모임을 자처함으로써 아주 가공할만한 평준화기계가 된다. 돈은 이로써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 불가능성을 가차없이 없애버린다.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게오르그 짐멜



자본주의의 시간은 시간과 화폐의 결합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시간은 돈이다”라는 것이다.

화폐화된 시간은 이제 자본주의에서 생산이나 교환, 분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활동을 규제하는 일반적인 형식이 된다. 모든 것은 화폐화됨으로써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고, 모든 활동은 화폐화되는 한에서만 생산적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모든 시간은 화폐화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시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이진경



카드1.jpg
 
이런 과정을 통해 근대 사회에서 '시간=돈'이라는 인식이 강해졌지만, 현대사회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시계바늘의 숫자를 의미없게 만들었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용어가 따로 생길 정도로 현대 사회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근대보다 더욱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결국 기존의 시계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시간 개념이 해체된 것인데, 얼마나 노동을 했느냐보다는 어떤 결과를 내느냐가 더욱 중요해졌다. 디지털 기술이 시공간 제약을 뛰어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기에 이제 더 이상 시간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다량의 시간 투입은 근대 사회로부터 내려오던 결과로 기본값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 근무 시간의 양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없진 않지만, 아직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근대식 시간 사유에 익숙하다. 덕분에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에 더불어 좋은 결과까지 내야한다는 압박에 사람들은 늘 시달린다.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진 이유는 대안이 많아지고

꼭 해야 할 일과가 줄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일과 가정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직장과 가정생활의 명확한 경계가 없다.

근무 시간이 지났는데도 퇴근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항상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끼고,

몇 분 정도는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뉴필로소퍼 06 / p.27



디지털 기술이 시간의 해체를 가져왔지만 이는 자연 시간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인공적 시간에 뒤덮이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 종속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위에 올라선 존재는 자본이다. 자본의 여부가 여전히 시간의 가용성을 가른다.




자유인, 시계 없이 흘러가는 나날을 향해



3.jpg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불안을 온전히 받아들이란 말이 와닿았다.
내가 종종 느끼는 불안은 그저 나를 온전히
나로 보기 위한 과정일 때문이었을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시간과 재정의 압박을 벗어나야할까. 정확한 정답은 없지만 가장 좋은 것은 시간이 돈으로 바뀌는 등가교환법칙을 벗어나는 것에 있다. 시간을 기준으로 경제적 가치가 형성되는 삶보다는 가치를 기준으로 경제적 가치가 결정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우리는 다시 자연적 시간을 향유할 수 있게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획일화된 시계바늘에서 벗어나 시계를 보지 않는 보내는 나날들을 맞이해야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시공간의 제약을 거의 없애주기 때문에 자본으로 구성된 세계를 교묘히 빠져나갈 수 있다. 자신의 가치를 발굴해 이로 먹고 사는 일은 결국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개별성에 대한 성찰, 주체성의 회복으로부터 발휘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자.

여기 시곗바늘에 쫓기며 살아가는 인생과 가치를 추구하는 인생이 있다. 전자에서 후자로 변하는 방법은 시간과 돈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의 지배를 받는 시간을 해방시켜 온전히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가치 기반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창조적인 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를 제외하곤) 늘 자본 앞에 주춤하며 시간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시간을 벗어날 줄 알아야한다.

시간을 자꾸 '멈출' 줄 알아야한다.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 숨에 맞게 늘이고 줄이고,

빨리 돌렸다가 천천히 가게 할 줄 알아야한다.


나성인





[한나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E-Mail : artinsight@naver.com    |    등록번호 : 경기 자 60044
Copyright ⓒ 2013-2019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