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달나라에 사는 여인 [도서]

환상 속에 사는 그녀와 환상적인 이야기.
글 입력 2019.04.30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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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책의 제 첫 장을 시작하는 단어는 다름 아닌 ‘할머니’다. 부모의 어머니 또는 늙은 여자를 이르는 말로도 쓰이는 이 세음절의 단어는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달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게다가 풋내나고 싱그러운 여인을 연상시키지도 않았다. 시작부터 오는 제목과의 거리감에 당황하기도 잠시, 화자가 할머니의 손녀라는 걸 파악했다. 그러자 할머니에게도 존재했을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이마와 탄력 있는 피부 결의 여자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처녀 시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구혼자들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며 불 같은 사랑을 꿈꿨다. 그녀는 제 욕망을 가득 담은 정열적인 시와 편지를 구혼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한번도 해본 적 없지만 언젠가는 제게 올 부푼 환상과 기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시대 배경은 여성의 정숙함을 강요하던 제2차 세계대전 속 이탈리아. 그 당시 여성들처럼 조신하게 지내길 바라는 제 어미에게 구박받으며 손찌검을 당하기도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그녀는 마을에 나타난 아내와 사별한 남자(훗날 할아버지)와 결혼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의 결혼생활 동안 남편을 사랑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사랑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사창가에 드나들던 남편의 성 욕구와 들끓던 할머니의 욕망이 서로를 만족시킨 순간에도 사랑은 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황홀한 육체적 쾌락도 사랑이라 이름하기엔 모자랐다.



사랑은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 잠자리를 함께하거나 친절하게 대하고 착한 행동을 해도 찾아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이 다가오게 만들 도리가 없다는 것도 이상했다.


- p.26



할머니는 왜 인생에서 한번쯤 겪는다는 사랑이 자신에게는 오지 않는 건지,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지 신을 원망했다. 그녀에게 사랑은 인생의 목표이자 사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하늘도 애틋했는지 마침내 기도를 들어준 것일까. 신장결석으로 요양차 방문한 온천에서 드디어 사랑이라 불리는 남자를 만났다.

 

제복을 갖춰 입은 깔끔한 상태의 절름발이 남자, 재향군인. 그는 할머니와 똑같이 신장결석을 앓고 있고 슬하에 딸까지 둔 아버지이자 누군가의 남편이었다. 각자의 가정을 뒤로한 채 두사람은 불같은 사랑에 빠졌고 그는 할머니의 낯뜨거운 시까지도 사랑해주었다. 둘의 만남 이후로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를 잊지 못했다. 남자가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는 게 인상 깊어서 훗날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을 만큼 미련을 놓지 못했다.


그녀는 재향군인이 있다는 밀라노에 방문했을 때도 온통 그의 생각뿐이었다. 제게 남편과 아들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좋을 만큼. 당장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



그녀에게 사랑은 뭘까. 사랑은 뭐길래 그녀의 눈을 멀게 했을까. 왜 노력할 수 없는 걸까. 그런데 정말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을까? 갖가지 의문이 들었다. 확실한 건 서로의 욕구를 풀어주는 것은 이해타산에 맞았던 것이고 그녀가 남편에게 드는 감정은 단지 경제적 여유에 대해 고마운 마음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좇던 사랑은 너무 환상적이고 속세를 떠난 낭만적인 것이라 현실에서 다가오는 무엇도 그녀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그녀의 남편이 무언의 눈빛으로 사랑을 말해도 그녀에게 와닿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분명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사랑했다. 할머니는 몰랐으나 나는 알 것만 같았다.


소설은 중간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작은 반전들이 존재한다. 그토록 고대하던 사랑을 만났으니 당연히 두손을 잡고 도망치기라도 했을 줄 알았던 재향군인이 다시 본토로 돌아가고, 할머니는 다시 남편에게 돌아가서 임신한다. 그러나 후반부엔 화자가 자신의 할아버지는 아마 재향군인일 거라며 또 다른 반전을 덤덤하게 읊는다. 그런데 또다시, 이 모든 게 할머니의 상상이었다는 기 막힌 반전이 상황을 뒤집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찾은 재향군인의 편지에서 할머니의 ‘상상’이 재밌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술된 모든 상황을 거짓으로 덮어 재향군인이 화자의 할아버지라는 가설도 신빙성이 사라진다. 다시금 할머니의 남편이 할아버지가 되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누구이냐’를 가리는 진실 공방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끝으로 갈수록 긴장의 끈을 부여잡게 만들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반전과는 별개로 할머니의 상상임이 밝혀지자 왠지 모르게 슬퍼졌다. 그토록 사랑을 기다리고 구애하던 그녀에게 진정 사랑이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사실이 애잔했다.

 

할머니의 정신이 남들이 보기에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도 이유가 있던 것처럼 구박만 하는 것 같던 그녀의 엄마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며느리이자 화자의 엄마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녀를 속박하던 외할머니에게도 처절한 이유가 있었다. 모두가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자식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품고 다시 사랑하게 하기도 한다.

 



'이름의 부재'



참 특이했던 건 소설의 마지막까지 ‘이름’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이름, 할아버지, 하다못해 재향군인의 이름까지 알 수 없다. 처음엔 손녀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소설이라 이름보다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굳이 호칭을 노출한 의도를 생각해봤다.


'할머니'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라는 단어. 늙어도 사랑을 원하나? 할머니도 사랑을 꿈꿀 수 있나? 할아버지를 원수처럼 여기며 등을 돌리고 잠을 청하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사랑이라곤 읽어낼 수가 없었는데. 나는 감히 그런 판단을 했었다. 그런데 '그녀', '여자'라는 말보다 '할머니'란 호칭으로 서사가 진행되니, 이내 할머니도 사랑이란 감정을 품는 여자라는 걸 느꼈다. 할머니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왜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까. 그런 나의 편견이 부끄럽다. 은연중에 할머니에게 가지는 편견을 돌이켜 본 기회가 됐다.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주는 임팩트가 없어 아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가상의 존재가 더욱 힘을 가질 수 있었다. 할머니로 불리는 여자의 외모를 상상하면서 읽다가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제나 환상의 존재는 흔적을 남기지 않아 더 신비하지 않나. 백발의 '할머니'가 사랑을 꿈꾸는 건 와닿지 않아도 백발의 '제인'이 사랑을 꿈꾸는 건 있을법한 일이니. 분명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서 여인이 더 몽환적이었다. 그리고 이 흐릿한 존재가 지니는 사랑을 향한 강렬한 열망은 소설 분위기를 더욱 감성적이고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 소설을 할머니와 사랑. 어울리지 않는 이 두 가지의 단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려낸 책이라고 감히 평한다.



평생 달나라에 사는 여자 같다는 말을 들은 여인
같은 달나라 남자를 만나서 함께 보낸 환상 같은 사랑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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