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폭력의 세계에서 탈출을 노래하다 [공연]

연극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
글 입력 2019.04.1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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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계에서 탈출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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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눕시스


강원도 고성군 초입의 허름한 백반집. 서른을 갓 넘긴 재영이 이곳의 사장이다.


약혼자인 성진과 함께 이제 이곳을 떠나 푸드트럭 장사를 해보려는 재영. 그런데, 서울에서 회사다니는 동생 재희가 연락도 없이 내려왔다.


아는 형이 사는 캐나다로 가겠다며 재영에게 손을 벌리는 재희. 게다가 처음 보는 사이일 줄 알았던 약혼자 성진과는 군대 선후임 사이였으며, 둘 사이는 꽤나 안 좋았단다.


이제는 재영의 결혼까지 반대하고 나서는 재희. 결혼, 푸드트럭, 이민으로 얽힌 세 사람의 갈등은 점차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결국 서로가 외면해 왔던 과거의 치부와 상처들까지 드러나기 시작한다.



타인을 위한 요리는 각별하다. 요리는 언제나 사라질 것을 알고 만드는 결과물이고, 특히나 요리사를 직업으로 하지 않아 별도의 대가를 받지 않을 때, 그것은 선물과도 같은 베풂이지만 또한 일상적인 것이다. 가족을 포함하여,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식사를 대접받거나 대접하였다면 그는 분명 특별한 사람일 것이다. 가족을 다른 말로 식구라고 부르는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일 테다.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 (<비, 쏘, 야>)의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에 담긴 사연은 조금 더 복잡하고 훨씬 더 비극적이다. 그 소박한 반찬에 얽힌 이야기는 가해자의 것이면서, 또한 피해자의 것이다. 자신과 딸을 수시로 폭행하는 남편이 먹는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에 락스를 한 숟갈씩 넣었다던 재영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래, 고백하건데 경악을 뒤따른 것은 통쾌함이었고, 남은 것은 불쾌한 끔찍함이었다.


자신의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는 피해자가 한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는 그 당당함. 피해자는 영원히 자신을 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힘과 권위에 대한 믿음, 폭행을 당해 왔음에도 그의 앞에 한 그릇의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비참함. 그것이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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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계속 생각만 했다. 나는 재영을 생각했다. 어쩌면 이 글이 책임을 회피하듯 변두리만을 빙빙 도는 겉핥기식의 무언가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그건 순전히 재영의 탓이다. 재영에 대해 가타부타 글로 재단하고 평가할 자신이 내게는 없다. 재영이 다만 <비. 쏘. 야>의 재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의 수 많은 재영으로 보인 탓이다.


재영은 울지 않는다. 상황이 엉망진창으로 꼬여갈때도, 케케 묵은 감정들을 쏟아내고, 각자의 생존을 위해 똘똘 뭉친 자기 변명에 직면할때도 울지 않고 다만 웃는다. 하, 하고 악다구니 같은 외침처럼, 혹은 속빈 헛웃음처럼 웃는데, 도리어 그 웃음이 울음보다도 슬퍼 견딜수가 없었다.


그리고 재영이 자신은 엄마처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였을 때,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폭행에 휘말려 피를 뒤집어 쓰고 온 성진의 얼굴을 닦으며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을 때. 수가 틀린다면 언제든 그의 음식에 락스를 한 숟갈 넣을 수 있는 듯 굴었을 때. 나는 안도했다. 재영이 정말로 자신을 위해 주변 모두를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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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쏘, 야>의 세 사람은 모두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아버지의 폭력에 희생당했던 피해자 재영은 아버지를 살해한 가해자이고, 어머니와 누나의 피해를 방관하였던 가해자 재희는 군대에서 성진의 폭력에 의해 피해자가 된다. 군 밖에서는 늘 폭력의 피해자였던 성진은 군내에서는 폭력의 가해자로 변모한다.


물론 그들이 완전히 같은 상황인 것은 아니다. 나는 재영의 가해에는 안도하였으나 성진의 가해에는 분노했다. 왜 자신을 괴롭혔냐는 재희의 질문에 성진은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와 재희가 닮아서라고 변명하지만, 재희의 말마따나 재희는 그가 아니다.


남들처럼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던 성진의 말과 내가 더러워서,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거겟지, 하고 대꾸하는 재희의 말은 결국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지적한다. 강자에 대한 약자의 가해와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가해, 내가 재영의 가해에 안도하고 성진의 가해에 분노했던 이유는 어쩌면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 간의 폭력은 결국 폭력적인 사회와 함께한다. 재영은 성희롱을 일삼는 노인들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폭행을 일삼는 남자들과 사귀어 왔으며 그로 인해 ‘헤픈 년’이라 모욕당하는 사회를 견뎌야만 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성진도, 성소수자인 재영도 사회의 폭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들 개개인은 사회 속에서 약자이고, 그들이 속한 작은 사회, 이 시골 마을은 더 큰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마찬가지로 약자이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해 그들은 저항하지만 승리는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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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들이 폭력이 없는 더 나은 세상 즉, 이 시골 마을을 벗어나 떠도는 푸드트럭의 일상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캐나다로의 탈출을 꿈꾸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다. 그 탈출이 실제로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의 결과가 아니라 적어도 탈출할 길이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살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가 탈출을 꿈꾼다. ‘탈조선’, ‘탈조’라는 단어는 신조어라고 하기엔 이미 오랫동안 우리의 입에 오르내렸고 지금도 그렇다. 탈00 이라는 단어는 곧 여기에는 희망이 없고, 저기에는 희망이 있다는 의미다. 희망은 있다.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에는 있다.


*

     

나는 이야기에 관성이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맺음말이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요?’는 분명 다르다. 전자는 꽉 닫힌 해피엔딩이지만, 후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 <비. 쏘. 야>에서 나는 세번의 엔딩을 봤다. 재희가 방파제에서 뛰어내렸을 때, 다 같이 밥을 먹는 와중 재영이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음을 밝혔을 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탈출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셋의 모습에서 나는 가능한 세 가지 끝을 보았다.


앞의 두 장면은 다소 절망적인 메시지이다. 이 폭력의 사회에서 약자로서 탈출하는 방법은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것처럼, 마치 매일을 ‘죽여버릴까?’와 ‘죽어버릴까?’를 고민하였던 그들의 이야기처럼,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그러나 마지막, <비. 쏘. 야>의 진짜 엔딩은 다른 길을 찾는다. 탈출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며, 그들은 폭력으로 가득한 사회를 벗어나 희망을 향해 떠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채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내게 <비. 쏘. 야>는 그런 작품이었다.


불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희망을 노래하는, 폭력의 사회에서 탈출을 꿈꾸는 세 사람과,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김민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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