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경계 너머의 삶에 대하여, 하룬 파로키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3.28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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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27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예정인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녀왔다. 액자에 담겨 가이드라인을 따라 이동하는 일반적인 회화 전시가 아닌 미디어 아트 전시를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 다녀와서 낯설기도 했지만, 영상이 주는 독특한 매력 덕분에 계속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아직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새로운 체험을 하기를 바라며 글을 써본다.



 

<평행 1~4>, 게임 캐릭터는 현실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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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게임의 그래픽은 아무리 현실적이라 해도 현실을 완벽하게 구현해내지는 못한다. 물로 빈틈없이 차 있는 현실의 바다와는 달리, 게임 속 바다는 수면 아래가 텅 비어 있고, 만지면 흔들리는 현실의 풀과는 달리, 게임 속 풀은 그 형태가 고정되어 있다. 게임 속 캐릭터의 동작에도 한계가 있다. NPC(Non- Playing Character, 플레이어가 움직이는 인물 이외에 게임 속에 존재하는 기본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은 한정되어 있고, 일정 경계를 벗어나면 경고 문구가 뜨기도 한다.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게임 속에서 구현되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경계를 벗어나는 환경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행 1~4>는 이처럼 총을 쏘고, 사람을 죽이는 데는 거리낌이 없지만, 앞으로 걸을줄만 알고 산은 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의 모습과, 게임에서 가지 말라고 하는 경계 너머를 어떻게든 가려고 시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행동들을 할 수 있는, 어찌 보면 전지전능해 보였던 캐릭터는 순식간에 우스운 모습이 된다.


그러나 이는 게임 속 캐릭터의 모습만은 아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정작 경계 너머의 것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현실에는 게임과는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제약이 존재한다. 또한 인간의 기억과 인지는 게임보다도 더 단순하고 허술하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과거의 비슷한 경험에 기초해 상상으로 채워버리기도 하고, 텅 비워두기도 한다. 보이는 만큼의 세계만을 보고,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느끼는 부분만 정교하게 기억하는 우리는 게임 속의 세계를 살아가는 캐릭터와 다르지 않다.




<비교>, 노동에는 귀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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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업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아마도 비효율적이고, 느리고, 원시적인 무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산업화를 거치며 수공업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프레임이 씌워지게 되었다. 기계가 없었더라면 내가 도시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더욱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 <비교>는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과연 수공업은 기계공업보다 열등한 것인가?


두 가지 화면으로 구성된 <비교>는 한 화면에는 손으로 벽돌을 옮기고 시멘트를 발라 집을 짓는 아프리카와 인도 노동자의 모습을, 다른 화면에는 공장에서 기계로 벽돌을 대량생산하는 유럽 노동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프리카와 인도의 노동자들은 땅을 쿵쿵치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유럽 노동자는 시멘트 위에 얹어지는 벽돌을 쿵쿵 두드리는 두 장면을 교차시키며, 두 노동의 본질뿐만 아니라 양상도 일부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영상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느리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익숙한 도시 문명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봐왔던 수공업은 다른 시선으로 보인다. 우리도, 그들도 각자에게 가장 익숙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일할 뿐인데도, 기술이 우월한 것이라는 편견으로 오만하게 판단했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머리로는 분명 모든 문화가 존중받아야 하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최적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노동의 싱글 숏>, 벽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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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자연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누군가의 노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내가 아침에 눈을 뜨는 아파트도, 매일 디디는 아스팔트 바닥도, 등교길에 듣는 음악도, 화장품과 옷도 전부 누군가가 생산해낸 것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매일 떠올리고, 생산물 이면의 생산 과정에 대해 상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노동의 싱글 숏>은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풍경 이면에 있는 전 세계 노동자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노동의 형태는 정말 다양하다. 합창단 반주자, 빌딩에 매달린 기술자, 사진작가, 식당 요리사 등, 우리가 분명 아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노동을 한참동안 지켜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각 국가에서 촬영된 영상들을 각각의 화면에 틀고, 한 공간에 이리저리 배치시켜 두었는데, 이러한 배치는 우리가 발 딛는 어디에나 노동이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각각의 영상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것은 아쉽지만, 마치 우리가 지나치는 건물 벽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사실 하나의 영상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이 배치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의 노동이 그러하듯이 (학생이라면 공부, 지금의 나는 글을 쓰는 것) 분명 하는 사람은 지루하지 않은데, 남의 노동을 지켜보는 것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들이 카메라 너머의 인터뷰어에게 말을 하거나, 노동 이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 지는 전혀 모른 채, 철저하게 ‘노동’ 그 자체만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동의 본질에 집중하며 생각해볼 수 있다.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



예술의 본질은 일상에서 우리가 지나치는 순간을 포착하고, 그 순간에 머무르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회화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이라면, 영상은 비교적 긴 삶을 그린다. 하룬 파로키의 작품들은 자신의 일상에 매몰되어 둘러보지 못했던 주변을 잠시나마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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