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땅 위 모든 삶이 교차하는, <지상의 밤> [영화]

글 입력 2019.01.28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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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처음으로 해외에 살면서 느낀 것은 세상은 정말 넓고 다양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종, 국적, 성장 환경 등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르게 살아왔기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고,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만 통한다면 어떤 이야기든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한 뒤로는 새로운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났는데, 많은 경우 다시 볼 일이 없어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친구들의 삶을 통해 나의 편견을 깰 때도 많았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왜 꼭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던 순간은 인류 보편적인 공통점을 발견할 때였다. 지구상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대부분 비슷하구나, 라는 동질감을 느꼈을 때.

<지상의 밤>은 이처럼 다양하면서도 비슷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함축하고 있는 듯한 영화이다. 영화는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다섯 개의 도시, 택시 안에서 이루어진 만남을 그리고 있다. 택시라는 공간은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없는 완전한 타인들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우연히 조우하는 곳이다. 택시가 도시 곳곳을 누비는 운송수단이라는 점에서, 영화의 무대는 이 넓은 세상 속 무수한 만남의 표본 같다. 카메라의 시선은 각 도시의 언어로 이루어진 대화에 녹아 들어, 여러 개의 세계가 교차하는 순간을 조용히 담아낸다.


*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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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을 질겅질겅 씹고 담배를 뻑뻑 피우며 운전하는 앳된 얼굴의 택시기사 코르키의 첫 인상은 ‘착실해 보인다’는 아니다. 그녀는 공항 앞에서 전화를 하다가 옆에서 통화하던 캐스팅 디렉터 빅토리아를 태우게 되는데, 전화를 끊은 뒤 동시에 “Shit!”을 외친 후 눈이 마주쳐서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이 두 캐릭터의 대비가 참 재미있다. 진한 화장, 치마 정장을 입고 가죽 캐리어를 네 개씩이나 가지고 다니는 빅토리아에 비해 코르키는 캡모자와 헐렁한 셔츠에 주렁주렁 달린 장비들, 화장기 없을뿐더러 검댕까지 묻어 있는 얼굴이다. ‘아끼는’ 캐리어를 던지듯이 트렁크에 싣고 다리를 채 넣지도 않았는데 문을 닫으려고 하는 장면은 상반된 면모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두 인물이 추구하는 가치도 아주 다르다. 배우가 될 것을 제안하는 빅토리아에게 코르키는 태연하게 자기는 자신만의 삶이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찾는 가치는 정비공이 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빅토리아는 모든 사람들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했기에 당황하지만, ‘무비 스타’ 선택지를 한 순간도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단호한 태도는 비벌리힐즈에 있는 집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이다. 하지만 두 여자는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서로에게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다. 담뱃불을 붙여주고 함께 피우는 장면에서처럼, 짧은 교차점을 지나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2.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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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는 기어를 제 위치에 놓지도 못하는 어리숙한 택시 운전사이다. 그러나 아무도 태워주지 않는 뉴욕의 거리에서 유일하게 요요를 태워준 드라이버이기도 하다. 요요는 헬무트의 운전 실력을 참지 못해 직접 운전하기로 하고,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그에게 운전뿐만 아니라 몇 가지 슬랭도 가르쳐 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서로 헬멧과 장난감이라며 놀려대지만 아무도 불쾌해하지는 않는다. 말이 잘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택시 안에서의 유쾌한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다소 차갑게 그려지는 뉴욕에서 서로에게 타인인 이방인들이 만들어 내는 유대는 따뜻하기 그지없다. 헬무트의 군밤 모자를 촌스럽다며 비웃던 요요는 자신과 같은 모자라는 헬무트의 주장을 극구 부정하지만, 욕쟁이 동생 안젤라에게 모자 지적을 받고 나서는 아마 묘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손님과 기사의 역할이 바뀐 상황에 안젤라는 황당해하고 요요와 말싸움을 이어가지만, 그런 그들에게 좋은 가족이라고 말하는 헬무트 덕분인지 공격적이던 안젤라도 어느 새 그의 웃음에 함께 웃고 있다. 뉴욕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를 조금이라도 알려주려는 요요에게 헬무트는 돈이 필요하지 중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3.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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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경 파리. 한 흑인 택시 운전사는 다른 흑인 손님들에게 지역과 지위로 인해 모욕을 당하고 그들을 쫓아낸 후, 지팡이로 택시를 부르던 한 여자를 태우게 된다. 그녀가 맹인이기 때문에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던 그는 호기심을 빙자하여 그녀에게 무례한 질문까지도 서슴없이 하지만, 그녀는 그를 무시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일일이 답을 하며 맞선다. 자신의 피부 색을 맞춰 보라는 운전수에게 색깔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성관계를 하냐는 질문에는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고 답한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을 지 맞춰보라는 물음에 목소리만으로 정답을 맞추고 나서야 운전사는 그녀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 하다. 그러나 자신을 차별적 시선이 아닌 그 자체로 ‘봐’주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끝까지 외부적인 것에 머무르며 때로는 보지 않아도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를 내려 주고 충돌 사고를 낸 그에게 상대방이 “당신 장님이야?”라고 물었을 때 살짝 보이던 그녀의 미소가 기억에 남는다.



4.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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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길에서 사랑을 나누는 로마의 새벽, 선글라스를 쓰고 일방통행 도로를 거꾸로 달리는 한 택시 운전사는 한 신부를 태우게 된다. 그는 혼자 있을 때도 수다스러웠으나 청자가 생기니 한 술 더 뜬다. 신부는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는 그의 요청을 거부하지만 그는 수락 여부에 개의치 않고 고백을 시작한다. 신앙심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듯한 그의 고해 내용은 그와 신부 사이의 접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을 부각시킨다. 상대방의 반응이 전혀 없음에도 운전수는 고해를 이어가고, 사랑에 대한 그의 철학이 당혹스러워질수록 신부의 몸 상태는 나빠진다.

결국 신부는 운전사의 끊임없는 수다 덕에 먹으려던 약을 떨어트리고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사망한다. 뒤늦게 그의 상태를 알아챈 운전사는 자신의 죄목에 ‘성직자를 죽인 죄’를 더한 이후를 상상하며 달린다. 당황한 것 치고는 꽤나 침착하게 수습하는데, 길거리의 벤치에 신부를 내려 놓고는 팔 사이에 성서까지 끼워 넣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에피소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 신부님인데 몸무게는 추기경 급이네”. 세상의 무수한 만남 중 어딘가에 존재할까 싶은 황당한 교차점이다.



5. Helsin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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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세 남자들이 눈 쌓인 헬싱키의 거리를 달리던 택시를 잡는다. 그들이 거하게 취한 것은 그들 중 ‘아키’라는 한 친구에게 일어난 일 때문인데, 택시 운전사 ‘미카’는 언쟁을 벌이는 남자들에게 그의 사연을 물어 진정시킨다. 사건들은 모두 하루 만에 일어난 것으로, 새 차를 산 다음 날 직장에서 잘리고 차는 고물이 되고 16살 딸은 임신을 하고 집에서는 아내가 식칼을 들고 그를 쫓아냈다. 취해서 잠이 든 아키를 제외한 두 친구들은 그의 사연을 듣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택시 운전사 ‘미카’를 보고 의아해하지만, 곧 그가 가진 불우한 사연을 듣게 된다.

그와 아내는 5년 동안 기다리던 아이를 얻었지만 아이가 너무 일찍 나와 곧 죽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사랑하는 아이를 잃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정을 주지 않다가, 결국 사랑으로 살리고자 결심한 직후에 아이의 죽음을 접한다. 두 남자는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아키’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부둥켜 운다. 아키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미카는 아내가 쫓아낼 것이 뻔한 그를 걱정하지만, 운전사와 손님의 관계가 그러하듯, 목적지에 왔으니 그저 내려줄 뿐이다. 다음 을 살아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지만, 택시가 같은 마음으로 가득 찼던 그 순간은 마음이 조금 데워지지 않았을까.


[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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