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스페인,맑음]#6. 마음 따라가기

글 입력 2019.01.1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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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月 말, 영국 런던, 강한 비바람



9월 말, 한국은 슬슬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는데 말라가는 아직도 쨍쨍한 여름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학원 intensive course 기간도 끝이 나고 일주일 정도의 방학이 주어졌다. 사실, 어학원 다니랴 학교 수강신청하랴 여기저기 말라가 탐방을 하느라 방학엔 무엇을 해야 할까 딱히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함께 수업을 들은 친구들도 비슷하겠지라는 마음으로 "이번 방학에 뭐해?"라고 물으니 다들 나름의 여행 계획이 있었다. 방학까지 남은 기간은 이틀, 이러다간 나 혼자 말라가에 남겨지겠다는 마음에 급히 스카이스캐너를 뒤져봤다. 얼마 남지 않은 비행기 표 가격은 생각보다 비쌌고, 호스텔 가격은 더 비쌌다. 그래도 한국에서 오는 것보다야 훨씬 싸지라고 자위하며 영국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사실 사람마다 여행 스타일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전까지의 나의 여행 스타일을 살펴보면 난 주도면밀 계획형. 엑셀을 써가며 일정과 교통수단을 체크해야만 마음이 편한 스타일의 여행자였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계획 없이 가는 여행은 처음이라 설렘 반, 걱정 반인 상태로 영국 땅을 밟았다. 쨍쨍한 말라가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우중충하고 으슬으슬한 낯선 날씨, 영드 '셜록 홈스'에서 많이 듣던 영국식 악센트,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높은 건물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영국의 상징, 빨간색 2층 버스를 보니 그제야 내가 정말 영국에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무계획인 상태로 아무 곳이나 갈 수는 없는 일. 첫날은 여독을 풀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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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영국 날씨
 


무작정 떠난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문제없이 잘 흘러갔다. 오히려 빡빡하게 짜지 않은 계획 덕분에 변수가 생기더라도 쉽게 수정할 수 있었다. 항상 '오늘은 여기 여기에 꼭 가야 해!'라는 조급한 마음으로 다니던 여행보다 마음이 훨씬 편한 여행이었다. 7일 동안 런던에만 있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런던은 대부분의 관광지가 무료입장이라는 점이었다.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무료라니. 내가 예술 전공생이라면 정말 영국에 살고 싶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가장 유명한 미술관 중 하나인 '내셔널 갤러리'에 입장을 한 후엔 질투가 났다. 이렇게나 좋은 예술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고 그걸 다 무료로 관광객에게 보여준다니! 너무 부럽잖아? 우리나라에도 이런 문화적 자산이 풍부했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막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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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사랑하는 화가, 고흐
 


벨라스케스부터 렘브란트, 터너, 고흐, 모네까지. 한국에선 미술책에서나 보았던 그림들이 내셔널 갤러리의 벽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건 약간 too much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명한 그림들이 가득했다. 고흐 그림을 보러 가다가 잠시 한눈을 팔면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그냥 지나치고 갈 수준이랄까. 좋아하던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사실 내 관심을 더 사로잡은 것은 그것들을 습작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림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몇 시간이나 꼼짝하지 않고 그를 따라 그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게 미술 전공 학생들 같았다. 그들이 신기했던 게 나뿐만은 아니었던지 다른 사람들도 흘긋 흘긋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돌아다니다가 슬슬 다음 곳으로 이동할 무렵, 화장실을 들를 겸 아래층으로 향했다. 유명한 그림들이 없기 때문인지 아래층은 위층보다 상대적으로 한산하고 조용했다. 친구는 화장실을 가고 나는 발이 아프지만 내셔널 갤러리 온 뽕을 뽑아보자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어슬렁거릴 때였다. 조용하고 한산한 아래층에도 예상외로 습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위층에 있던 사람들보다도 더 관심을 갖게 된 건 백발의 할머니 한분이 습작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얼마나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은 이미 한 그림을 거의 완성하신 상태였다. 지나가시던 또 다른 할머니 한분이 어느새 옆에 앉아 두 분께서 대화를 시작하셨다. 나는 그림 보는 척, 앉아 있는 척, 은근슬쩍 그분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오랜만에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를 들어서 신이 나서 그랬을까, 외할머니 생각에 편한 마음이 들어 그랬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두 할머니의 대화에 동참했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할머니의 그림에서부터 과거까지 흘러갔다. 두 분께서는 모두 미술을 참 좋아하셨지만 개인의 사정으로 인해 젊은 나이엔 미술을 할 수 없으셨다는 이야기와 그래서 지금은 할 일 다 끝내고 이렇게 취미로 미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두 분께선 비슷한 상황을 겪으셨기에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하시는 듯했고 나에겐 "너는 아직 어리니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네 마음이 시키는 일을 찾아서 시작하렴"이라고 말씀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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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따라 가는 길
 


20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순간은 7일간의 영국 여행 중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처음 본 누군가에게 그 순간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을 떠나 온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남들 따라 강남 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대기업을 가는 게 좋다고 하니깐 대기업을 가야 할 것 같고, 그러기 위해선 남들 다 학점 잘 받으니깐 나도 학점을 잘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대외활동은 당연하고 공모전에 어학 시험까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보다 남들이 다 하는 일이고 필요한 일들을 하며 살아왔다.


열정이란 연료 없이 남들의 시선이라는 외부 연료로 굴러가던 기차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신경 써야 할 일이 태산인 학기 중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잊을 수 있었지만 이런 생활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나를 바쁘게 하는 남들로부터 벗어나 진짜 나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찾아보겠다는 각오로 교환학생을 온 것이었다. 이런 나에게 할머니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을 주신 것 같아 코끝이 찡-해왔다.


누구보다 나다운 나를 찾기. 그동안 한국에선 남들 신경 쓰느라 해보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신경 쓰느라 해야만 했던 것들. 다 벗어던지고 하고 싶은 것만 해보면서 살기. 부모님께는 죄송스러운 마음에 스페인어 공부 열심히 하러 간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번 교환 라이프의 가장 큰 목표는 이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에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음에도 어학원에 다니는 동안 끊임없이 남들을 신경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스페인어를 잘할까, 혹은 반대로 남들 다 수업 안 가고 놀러 가니깐 나도 놀러나 갈까.


계속해서 누군가와 나 자신을 비교하는 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고 또 이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만난 나의 인생 멘토의 말씀 덕분에 교환 생활의 목표를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훗날, 교환 생활을 마무리하는 날이 왔을 때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마음 따라 잘 흘러가 보아야지.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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