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연극 <마른 대지>

글 입력 2018.12.3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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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대지_포스터.jpg
 

[PRESS]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마른 대지>



지난 일요일, 연극 <마른 대지 Dry Land>를 보고 왔다.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안내문이 있었다.


*

트라우마 주의 (Trigger Warning)
본 공연은 극의 흐름상 욕설 및

성적인 대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출혈장면이 연출되오니 관람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트리거 워닝, 일방적으로 무대를 마주 봐야하는 관객들에게, 해당 작품이 트라우마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는 일종의 경고문이다. 종종 심신이 미약한 관객들을 위해 예매 시 고지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자세하고 세심한 트리거 워닝은 간만이었다. 내용상 주의 문구가 필요함에도 따로 트리거 워닝을 안내하지 않았던 여러 극이 떠오르기도 했다. 작품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자세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고마운 배려와 함께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그 걱정은 보기 좋게 ‘쓸데 없는’ 것이 되었다. <마른 대지>는 2018년, 올해 만나본 작품 중 가장 솔직하고 사실적인 극이었다.



시놉시스


“난 진짜로 너에게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선택할 자유 말이야.”


에이미는 임신 10주이다. 하지만 에이미 곁에는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부모님, 임신 사실조차 모르는 남자친구, 신뢰할 수 없는 친구들뿐이다. 합법적으로 낙태를 하기 어려운 상황인 에이미는 인터넷 서핑으로 알게 된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여 스스로 낙태를 하려고 한다. 그녀가 셀프 낙태 조력자로 고른 사람은 같은 수영부 선수인 에스터. 에스터는 친하지도 않은 자신에게 에이미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 어리둥절 하지만, 이내 필사적으로 에이미를 돕기 시작한다. 삶의 중요한 순간, 두 사람은 곁에 있는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고 의지하며, 숨 쉴 수 없는 무거운 물속을 헤엄쳐, 마침내 너르고 평평한 대지에 당도할 수 있을까?



*


“다시 쳐.”


시술비를 감당할 수 없다. 부모님에게, 남자친구에게도 알릴 수 없다. 애초에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복부 가격하기’, ‘계단에서 구르기’, ‘세제 마시기’와 같이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을 시도한 것은 에이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다시 쳐.” 이 말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지만, 에이미는 분명 아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했을 것이다. 때리는 사람이라고 몰랐을까. 에스터는 이 모든 행동을 함께 실천해야 했다. 분명 겁이 났을 것이다. 때론 본인의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 자체가 모두, 아팠다.


복부 가격 시도를 마치고, 그들은 걱정이 섞인 말투로 입시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학은 어떻게 진학할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친구나 애인에 대한 사소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방금 전 무모하고 위험한 행동을 실천하던 이들은, 원치 않는 임신의 피해자도, 문란한 청소년도 아니었다. 서글픈 비극의 주인공들도 아니었다. 그저 어디에나 있을 법한 10대 여성들이었다. 꿈을 꾸고 미래를 걱정하는 여학생.



마른대지_컨셉사진(c황가림)4.JPG
 

“작가 되고 싶다고.”

“진짜? 멋진데?


연극은 그들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섭식 장애, 징크스, 성 정체성, 자해, 감정. 솔직담백하고 조금은 맘 아픈 이야기들이 경쾌하게 쏟아진다. 그들의 상황은 매우 아팠지만, 그 아픔은 결코 감상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솔직하고 담담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대화는 말 그대로 “살아있었다”. 에이미와 에스터, 그들에겐 뚜렷한 서사가 있고 깊은 감정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10대 여성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단 것에 감사했다.


한편, <마른 대지>에서는 에스터가 가지고 있는 징크스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에스터에게 에이미의 진실을 알려주는 ‘에스터 엄마 친구 아들’이 등장한다. 캐릭터를 마주하는 순간, 남성중심극에서 극적 도구로 나오던 여러 여성 캐릭터들이 떠올랐다. 정보 전달 수단이 되거나 각성 계기가 되던, 하나의 극적 도구로 나오던 여성캐릭터들. <마른 대지>에서는 그 역할을 남성이 하고 있었다. 참 묘했다.


*


“낙태 장면은 있는 그대로 보여져야 한다.” <마른 대지> 작가 노트의 코멘트다.


결국 에이미는 약을 구한다. <마른 대지>에서는 에이미가 약을 먹고 낙태하는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피와 덩어리가 나오고, 아파하고, 울부짖는 그 모든 순간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관객은 숨죽이고 이 장면을 지켜봐야만 한다. 사실적인 묘사는 주인공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되, 이 모든 행위가 실재하는 것임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존재하는 일이라고 전달한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그 다음이었다. 에이미와 에스터가 떠나고 피로 젖은 신문지가 바닥에 널려있는 수영부실에, 청소도구를 끌고 관리인이 등장한다. 관리인은 어떤 한숨이나, 불평불만이나, 중얼거림, 의심, 놀람 하나 없이, 그리고 망설임 없이 수영부실을 치우기 시작한다. 오로지 치우는 장면만 약 5분간 이어진다. 관객은, 무표정으로 일관된 관리인의 표정에서 “별거 아니다”라는 반응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냥 이게 낙태인거야”, 그렇게 설명하는 것만 같았다. 거창한 설명이나 대사 한 줄 없이도 낙태가 대단한 것도, 끔찍한 것도, 죄를 짓는 행동도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치워낼 수 있는 일이라고, 쉬쉬해왔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평범한 일이라고. 몇 번의 걸레질로 설명한다.


한편,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연습도 없는 날에 신문지를 깔고 수영부실에 있던 여학생 두 명. 돌아오니 바닥은 피투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반응도 없이 청소만 하는 관리인의 모습이 여성의 건강권에 눈 감고 있는 법, 10대에게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한 어른과 제법 닮았다는 생각. 어떤 의미이든, 온갖 감정이 차오른 관객들이 한숨 고르며 에이미와 에스터에 대해, 현실에 대해, 임신 중단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


에이미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수영부실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고, 이따금 미래를 상상했다. 독서모임, 치즈 파티 같은 것을 얘기하며 시시콜콜 웃을 수 있었다. 에이미는 그런 현재를, 또 꿈꿀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해낸 것이다.



마른대지_컨셉사진(c황가림)10.JPG
 


나도 치즈 좋아해.
안 좋아하잖아.
맞아, 안 좋아해. 맥앤치즈 얼린 건 좋아해. 그건 다른 거겠지.
괜찮아, 너는 치즈 싫어하는 사람으로 있으면 돼.

꼭 치즈 얘기만 하는 건 아냐.
그럼 다행이네.


‘치즈 싫어하는 사람으로 있으면 돼.’ 너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있어, 그 말을 극은 이 같은 비유로 전달해냈다. 에이미와 에스터는 그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 선택할 자유가 있는 사람으로 남았다. 에스터가 죽 읽던 어느 과제물이 떠오른다. 축축했던 습지가 인간의 선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이 되었다는 이야기. 숨 쉴 수 없이 무거웠던 물 속을 벗어나, 어느 마른 대지에서 두 사람은 살아갈 터전을 잡았을 것이다. 에스터의 발진도 마른 대지에서는 가라앉았겠다. 부디 극이 아닌 현실 속 에이미, 에스터들도 그러하길, 그렇게 되길, 기도한다.


*


문득, 에스터는 에이미의 당황스러운 부탁을 왜 거절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에스터의 설명대로 에이미가 쿨해서? 에이미가 밀어붙였던 것처럼 에이미를 좋아해서? 어쩌면 맹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이든지간에, 에스터와 에이미의 연대는 참 단단했다. 쉽게 부서질 것처럼 보여도, 실은 매우 견고한. 가치관이 달라도, 꿈이 달라도 상관없었던 두 여학생의 연대를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감상을 빼곡히 적으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수많은 질문과 뚜렷하거나 흐릿한 답들이 떠오른다. 다만 이 극에 대해 분명하게 전하고 싶은 사실은, <마른 대지>가 임신 중단권과 10대 여성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는 너무 소중한 극이라는 것이다. 다가오는 2019년에는 이 극이 다시 무대로 돌아오길 바래본다.






마른대지_웹전단.jpg



<마른대지 Dry Land>



2018. 12. 20(목) - 12. 30(일)


예술공간혜화


평일 8시 / 주말, 공휴일 4시 (월 쉼)


작 루비 래 슈피겔 Ruby Rae Spiegel


번역 함유선


연출 윤혜숙


출연 김정 황은후 조의진 강혜련 정대진


제작 래빗홀씨어터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홍보마케팅 플레이포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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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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