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 세상 이야기 <맨땅에 헤딩하기>

글 입력 2018.11.23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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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첫인상이 있다.

마치 사람을 마주할 때처럼 책에도 첫인상이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 첫인상이 좋은 사람은 함께 있는 순간이 즐겁고, 이후에 다시 또 만나고 싶어진다. 고금란의 에세이 <맨땅에 헤딩하기>의 첫인상은 순수, 솔직함, 밝음 이런 것이었는데, 완독하고 보니 역시나였다. 읽는 내내 편안해지고 행복한 느낌이 들었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했다.

소설가 고금란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 이야기가 대다수였는데, 저자 고금란과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에게는 나서서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스스로 겪은 세상 이야기를 글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였다.

저자의 글은 마치 모든것을 포근하게 안아줄 수 있는 '엄마의 마음' 같았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밤에 잠들기 전, 하루동안 엄마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소곤소곤 전달해주는 기분이랄까? 별 것 아닌 '이야기'가 나를 웃음짓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울컥,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가슴을 후벼파는 경험. 다들 한번쯤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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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표현은 달라도 마음이 같은 사람이 있고 같은 표현을 쓰지만 마음이 따로인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잊을 것을 잊지 못하면 마음의 짐이 되고 포기할 것 빨리 포기하지 않으면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갔어도 잊어서 안 될 사람과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과 기억들은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살아가는 데 이정표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140p


 

<맨땅에 헤딩하기>를 읽다 눈물을 펑펑 흘렸다. 작가의 시외삼촌과 시외숙모의 이야기였다.



그날 외숙모는 기분이 좋았는지 '여자의 일생'과 '흑산도 아가씨' 등 이미자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호미를 내던지더니 뻗정다리를 하면서 소리 내어 우시는 것입니다.

"아이고 질부야, 내가 몬 살겠다, 집 안 구석구석 너거 외삼촌이 눈에 밟혀서 참말로 몬 살겠다. 보고 싶어 몬 살겠다." /32p


새집을 지었다고 동네잔치를 벌였던 외삼촌 집에는 지금 외사촌 시동생 부부가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 외삼촌처럼 장난기가 많고 외숙모처럼 술도 잘하는 시동생은 가끔 경운기나 트랙터를 몰고 나를 도와주러 옵니다. ···

"형수요, 엄마 아부지가 영 집에 올 생각을 안 하네, 오는 길을 이자뿟나?"

우스개처럼 말하지만 시동생의 눈자위는 벌겋게 물들고 남편은 컥컥 헛기침을 합니다. /34p



담담해서 더 슬픈 문체였다. 인생이란 이런게 아닌가 싶다. 웃는 얼굴로 꽁꽁 싸맸지만, 사실 그 뒤엔 치미는 울음을 꾹 참아내는 얼굴이 있다는 것. 장난인척, 우스개소리인척 말을 건네지만 사실 그 안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듬뿍 담겼다는 것. 살아가면서 만남과 헤어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헤어짐 뒤의 슬픔을 견딜 수 있는건 만남의 과정에서 소중히 품은 추억 덕분이 아닐까. 그래서 나중에 더 후회 없이 예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현재에 충실하게 나의 삶을 살아내고 지금 사랑하는 나의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아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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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입양과 기부 천사로 알려진 영화배우 차인표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반지하 창고에서 놀다가 창문에 머리가 끼어서 꼼짝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깜깜한 지하실 안에서 목이 막혀 죽을 지경에 놓여있는데 옆에 있던 형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울음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서 구출해 주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소리내어 울 수 없는 이들이 많으니 자신은 그저 그들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것뿐이라고요, 그것은 옳고 그름이나 이념을 떠나 생존에 관한 문제라고요. /15p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보통 '다수'의 편에 서는 사람이다. 어떤 확고한 신념이나 의지가 있어 그렇다기 보다는 '다수'가 주는 안정감과 주목받지 않을 수 있는 이점때문이다. 곧 '강자'를 의미하기도 하는 '다수'의 편에 서왔기에 <맨땅에 헤딩하기> 속 차인표 이야기는 내게 큰 충격이었다.


세상에 소리내어 울 수 없는 이들이 많으니 자신은 그저 그들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것뿐이라고, 그건 옳고 그름이나 이념을 떠나 생존에 관한 문제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걸까? 재개발사업 반대 집회에서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 작가의 모습을 지켜보며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나 역시 그녀처럼 늦기 전에 해야 할 말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고 말이다.




작가를 닮은 책 <맨땅에 헤딩하기>



<맨땅에 헤딩하기>의 첫인상인 순수함, 밝음, 솔직함이 곧 작가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작가의 세상사는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 같아서, 혹은 내 이웃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행복하고도 슬픈 마음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어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이런 것일까, 내가 만일 작가의 나이가 된다면 이렇게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따뜻한 글을 써낼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그때가 되면 나도, 인생이란 '맨땅에 헤딩하기'지만 나 역시 용케 여기까지 왔노라고 전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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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헤딩하기
- 소설가 고금란의 세상사는 이야기 -

지은이 : 고금란
출판사 : 호밀밭
분야 : 에세이
쪽 수 : 256쪽
발행일 : 2018년 8월 19일
정가 : 13,800원
문의 : 호밀밭(070-7701-4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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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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