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

글 입력 2018.11.05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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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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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꽤나 잘 버티고 있던 나는 오랜만에 터지는 울음을 삼켰다. 잘 버틴다기보다는 이제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서 당황했던 것 같다. 다른 게 아니었다. 내 우울감의 근본적인 원인을 다시 마주한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열심히 도망치다가 막다른 벽에 다다랐을 뿐이었고.

마지막 학기치곤 빡빡한 스케줄의 시험과 대체과제들을 처리하면서, 시험이 끝나면 영화를 한 편 봐야지 생각했다. 영화관 근처에 간 지도,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라는 매체를 소비한 지도 너무 오래된 것 같았다. 개강 이후론 거의 한 번도 보지 않았으니. 시험을 끝내고, 짜여진 발표 스케줄을 끝내고 한창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께서 겨울 방학 스케줄을 물으셨다. 같이 일을 할 수 있겠냐. 순간 내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가는 생각하나. ‘아, 나 12월 말에 기숙사 방 빼야 하는 구나.’ 지긋지긋한 이사가 또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 이사라고 부르기도 뭣하다, 그리 큰 규모도 아니다. 그냥 또 공간을 옮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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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올해 큰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의 8할은 안정된 주거지가 없어서였다. 누누이 이야기하고 다니지만 매번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일상 패턴이 생겨날 무렵 무너지고, 다시 패턴을 잡아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불안정한 생활 위에서 줄을 타듯 살다가 개강을 하고 기숙사에 들어와서는 꽤나 안정을 찾았다. 의식적으로 내 거주지 문제를 의식하지도 않았고, 종강 후 거취를 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있었으나 그 스트레스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LH전세, 행복주택, 이외의 여러 대안들이 있었으나, 집을 보러 다닐 과정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한 숨이 나왔다. 졸업논문에 학교 생활에 마지막 학교 생활도 간신히 하고 있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또 스트레스가 너무 커져서 우울증이 심해지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었다.

‘그냥’과 ‘기본’을 외치면서 나름 두텁게 다져왔던 지난 2달 간의 일상 루틴은 시험기간을 거치며 많이 어그러진 상태였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이해하지 못할 수업의 방식으로 인한 ‘하기 싫다’의 간극에서 나를 많이 쪼아 댄 터라 예상치 못한 거주지 부담의 어퍼컷은 강렬했다. 4년 기숙사 장학에 안주해 왜 나는 이후 대비도 하지 않았을까 자기 비판을 하다가, 이런 것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하는 내 처지에 대해 비관하다가, 그래도 나름 잘 이겨내고 있었다는 위안을 삼다가, 이 스트레스를 내가 어떻게 감당 해야 하지 불안해했다. 마음이 분주하니 몸은 오히려 축 쳐졌다. 그 와중에 취직 운운하며 돈 이야기를 꺼내는, 철없는 소리를 해대는 피를 나눈 누군가가 미웠고, 내 인생이 불쌍하다고 슬퍼서 울다가, 또 갑자기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휩싸였다. 그리고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우울이란 감정이 나를 또 집어삼킨 잠깐 동안 머리가 정지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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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잡는데 먹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가볍지만 상큼하거나 달달한 것들이 생각을 환기시키는데 큰 도움이 된다. 늦가을의 찬바람 역시 달구어진 감정을 식히는 데엔 제격이다. 엄마가 전화가 왔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어차피 끝 내야 하는 일이면 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남들이 다 하는 일이고 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겁을 집어먹고 있다. 아직은 현실 때문에 망가져버린 내 속으로 다시 현실을 마주하기가 버겁기 때문일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하나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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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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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작은 아니고 한국작품이다. 시골집에 계신 내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우리집 댕댕이가 보고 싶었다. 한국의 시골, 한국의 강아지, 한국의 풍경. 서울에서 살아갈라고 난리를 치는 나에겐 이런 힐링이 필요했다.

혜원은 나와, 내 또래의 청년들과 비슷하다. 서울에서 자기 살아갈 공간 하나 만들어보겠다 발악하는 존재다. 그녀는 일상 같지 않은 서울 일상에 지쳐 도망을 간다. 영화에서 아무리 아름답고 예쁘게 포장되는 시골 생활 일지라도 그건 도망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는 삶에 지쳐서 고민을 피해서 내려온 거지만, 그렇다고 시골에 완전히 정착한 것도 그렇다고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아니기에. 그렇지만 그녀의 시골 생활은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한 머무름의 시간이다. 망가져버린 자신을 다시 되찾고, 어느 정도 회복된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진단하기 위해서, 피폐해지고 지친 몸과 마음에 잠시나마 여유를 두기 위해서. 그녀의 도망은 절대로 의미없는 부정적인 도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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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도망친 생활은 결국 유년으로의 회귀였다. 마냥 행복했던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살던 집, 엄마가 해주던 요리,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 그녀가 시골로 오면서 갈망한 건 철없이 행복하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 커버린 채로 돌아온 혜원은 수능 날 갑자기 사라졌던 엄마에 대한 기억은 묻은 채로 자신만의 단순하지만 충실한 날들을 채워간다. 맛있는 음식, 자연, 온기를 나눌 반려동물, 친구들. 그녀가 자신의 회복을 위해 선택한 길은 우리가 삶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누려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그걸 당연하게 누릴 수 없는 게 우리 삶이기도 하다. 혜원은 우리를 대신해서 이를 채워준다. 영화 속에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싶어하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것들이 가득 가득 들어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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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사계 연작


특히 눈에 띄는 건 계절의 변화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사계절의 색감과 소리로 꽉꽉 채워져 있다. 누군가 그랬다. 매력적인 사람의 요소 중 하나는 계절의 변화를 잘 감지하는 거라고. 이 영화는 계절의 변화를 치밀하게 포착한다. 각 계절의 음식과 소리, 빛과 색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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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도 혜원도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도 나도 각자의 인생에 대한 방향을 결정 해야 했다. 힐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삶 전체를 탄탄히 지탱할 단단한 바닥이 필요했다. 영화 후반 부에 재하가 혜원에게 말한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거냐. 짧지만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내가 마주한 순간처럼 혜원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 영화의 결말은 그녀의 선택을 보여준다. 사실 풍부했던 영상미와는 다르게 이 부분은 굉장히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와 나의 가치를 다르다. 그랬다. 혜원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것이라지만, 그 선택이 나는 왜 씁쓸하게만 보였을까.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은 존중한다. 모든 이의 가치는 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불안정한 감정 때문인지, 그 결말이 다소 싫었다. 전혀 그런 의도를 아니겠지만, 내 선택이 응원 받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합리화를 시작했다. 영화의 흐름 상 이런 결말이 아니라면 너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나와 다른 결말을 보면서 나에게 ‘쉼’과 ‘기본’, ‘무민’의 의미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결국 나에게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나는 내 뿌리와 다른 바닥을 디디기로 선택했기에, 이들은 내가 그 바닥을 단단히 디디기 위해 필요한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지금 내가 부딪힌 벽도 이를 위해선 넘어야 하는 과정이다. 주문처럼 되뇌인다. 이번 한 번만 딱 제대로 넘기면 괜찮겠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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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다. 도망쳐도 괜찮다. 다만 나와 혜원처럼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곳에 다다를 때 우린 선택 해야 한다. 나의 뿌리로 돌아갈 지 아니면 새로운 환경에 뿌리를 내릴 지. 어떤 선택하든, 나는 오늘도 세상의 이들이 버티고 견디지 않는,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삶을 살길 바란다. 세상의 모든 삶들이 안녕하길, 그렇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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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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