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너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도서]

책 <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
글 입력 2018.10.10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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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표지 민트 바탕.jpg


‘내애~ 주~를 가까~이이 하~려~어 하~므~은…….’

절박한 마음으로 생전 불러보지 않은 찬송가를 다 불러댄다.


-18


 

저자의 내면에서 저절로 울린 찬송가는 위기의 순간마다 저자와 함께였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난 후, 내 귀에서는 ‘무너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다른 찬송가가 울리고 있었다.

    


까미노는 이렇게 내가 비난하던 것,

우습게 여기던 일,

나와 다르다고 쌓아 올렸던 벽을

사정없이 무너뜨렸다.

까미노는 나를 항복시켰다.


-259

 


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 시작하여 피스테라까지, 약 800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었던 순례길 이야기를 담은, 책 <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에 관한 감상을 세 글자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무너짐’이다.



* * *

   


순례길을 걸으면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을 거란 생각,

그건 착각이었다.

현재의 나를 명상하며

다가올 소명을 알아챌 수 있을 거라더니,

그 또한 착각이었다.


-66



“여자여, 한국에서 온 여자여, 웃어라.

길에서는 문제를 찾을 수 없다.

올리브 열매처럼 많은 웃음, 웃음을 주워가라.”


-91

 


알고는 있었다. 그러니까, ‘나를 찾기 위한’이라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이라는 명분을 단 여행은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몇 년 전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싶었던 언니의 제주도 일주일 여행담을 들은 후 얻은 팁이다.

 


바람은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나의 등을 거세게 밀며 지나갔다. 풀도 납작하게 몸을 눕혀 부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동쪽 하늘 끝에서 솟아오른 해는 바람을 타고 와서 나의 등을 비추며 그림자를 기다랗게 늘였다. 그때 나와 함께 서 있는 나를 만났다. 그날 아침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내 손을 잡고 함께 걷기 시작한 때는.


-109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더 잘’ 알게 되었다. 여행사건, 항공사건 아무튼 누구의 계략 혹은 전략이든, 암묵적인 구호처럼 알고들 있는 ‘여행에서 나를 만난다’는 문장, 혹은 마케팅에는 생략된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그건 바로 ‘무너짐’이다. 애석하게도, 맛있는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즐기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만 함께하는 여행에선 절대 무너질 수 없다. 그러니, ‘나’도 만날 수 없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의 무너짐일까?



* * *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그냥 익숙해지는 것 같아.”


-206


 

몸으로 걷기 – 마음으로 걷기 – 영혼의 길’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된 목차처럼, 저자는 몸에서, 마음에서, 영혼에서 차례로 무너진다.


피레네에서 다리에 쥐가 나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40일 내내 우비를 한 번도 벗지 못하도록 만든 까미노의 날씨는 저자를 지치게 만든다. 벌레에 물려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기도 하고, 발에 물집이 잡히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매일을 쉬지 않고 걸어야 하는 순례길을 위해 잠도 잘 자야 하는데, 하루 종일 비에 젖은 옷을 제대로 말릴 수 없이 습한 방을 얻기도 한다. 잠들기 전 진통제를 먹는 건 하루 일과와 같았으니 다 짐작할 순 없지만, 확실히 내 짐작보단 훨씬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그나마 육체적 무너짐이 정신적인 무너짐보다는 나은가? 쉽게 선택할 순 없겠지만, 만약 육체적 고통이 더 빨리 해소된다면 전자를 택하겠다. 저자를 괴롭히는 건 육체적인 한계뿐만이 아니었다. 까미노를 걷는 걸음은 저자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면, 그 걸음에 만난 사람들은 정신적 고통을 주었달까. 까미노가 ‘야고보를 팔아 그럴듯하게 보이는 좀 색다른 관광 상품일지 모른다는 회의감(66)’이 들기도 하고, 그다지 같이 있고 싶지 않을 만큼 불쾌감을 주는 몇몇의 사람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다.

 


그날 빗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겠다며

그녀가 서있던 날 알게 되었다.

그녀가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는 것을.

숨을 못 쉬게 하는 기억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그녀는 최선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164

 


‘만날 사람은 꼭 만난다’는 까미노의 기운 좋은 법칙을 맛보는 과정은 신비롭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지닌 기억이 나는 더 아프게 다가왔다. 속세의 사람들이 '자랑'을 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불행에 관해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 까미노의 마법이라 하더라도 불행은 불행이지 않은가. 8년간 함께했던 연인이 떠나고, 온 몸이 부서진 교통사고를 당했었고, 우울증에 걸린 아들이 어제도 자살시도를 했다는 연락을 받고 순례길을 멈춰야 하는 지경에 이른 건, 지나가긴 했지만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의 실화다. 저자는 바로 그 사람들이 달아나려고 하는 무거운 기억까지 간접 경험하며, 마침내 기도한다.


 

“하느님! 그냥 바라만 보시는 하느님! 우리가 당신의 자식이라면서 아픔과 불행을 막아주시지는 않고 그냥 보기만 하시는 하느님! 고통을 면하게 해주지는 않더라도, 손잡고 위로는 해주셔야 하지 않나요? 어떻게든 다 낫게 해주셔야 합니다. 이제라도 다 잊게 해주셔야 합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꼭이요! 기도가 엉망이라 죄송합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기도라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


-169

 


저자의 '엉망인' 기도로 어느새 나도 같이 기도하다 보니 좋아하는 책 속 문장이 번뜩 생각났다. 누군가 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사람의 자아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논리를 갖고 있다. 적어도 이 문장에 의하면 그렇다.



하나님이 전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자신을 계시하시려면,

그 과정에서 나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 나를 위한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프레더릭 뷰크너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필립 얀시, p.56



* * *



딸은 자라서 엄마가 된다. 엄마가 된 딸이 자신의 딸을 통해, 시계를 고르던 아버지와 딸이었던 자신을 만난 것이다.


-182

 


책을 읽는 나의 발에는 물집도 잡히지 않았고, 벌레로부터도 안전했고, 비에 홀딱 젖는 일도, 근육통에 욱신거리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자가 털어놓는 이야기가, 그의 깨달음이 마음을 저몄다. 깨달음에도 종류가 있다. ‘무너짐’은 ‘유레카!’처럼 비밀한 발견 뒤에 오는 환희의 외침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단 후회와 부끄러움에 가까운, 아픈 깨달음이다. 그리고 이건 예측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육체적 무너짐이 없으면 마음과 영혼의 무너짐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영성과 세속은 가까웠고, 감격과 실망의 교차는 일각을 넘지 않았다. 수사들의 성스러운 노동으로 향로는 여러 번 커다란 추처럼 흔들렸다. 성당 안에 향 냄새가 가득해져서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어쩔 도리가 없이 자꾸만 눈가가 젖어 들었다.


“네. 네. 제가 졌고 당신이 이겼습니다.”


-317, 318



그래도 다행이다. 마냥 아프기만 하다면 그 무너짐을 자처하는 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저자처럼 ‘제기랄! 모든 것에 감사하라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무너짐 이후에 오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다. 구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저자의 경험이 증명하는데.

    

* * *

 

프리뷰를 쓸 때,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영화도, 책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왜 이렇게 ‘그 곳’이 '핫'한지, 왜 많은 곳 중에서 꼭 '그 곳'으로 가야만 하는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다행히 궁금증이 풀렸다.


무너지기 위해서다. 나만의 이유를 얻으니 진심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이 궁금해졌다.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 주인공 라일리의 마음에 세워진 섬처럼, 나를 완전히 무너뜨릴 ‘까미노 섬’이 하나 새로 건설된 느낌이다. 언젠가 걸을, '그 곳'으로 향할 날을 고대하게 되었다. 단, ‘산티아고를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 만큼도 없다’는 저자의 확언 때문에라도, 산티아고를 향한 마음이 환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
- 나를 만나, 나와 함께 걷다 -

지은이: 박재희
출판사: 디스커버리미디어
분야: 여행 에세이
쪽수: 320쪽
발행일: 2018년 9월 5일
ISBN: 979-11-88829-05-7 (03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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