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문학을 편식했다 [기타]

소설이 껍데기처럼 느껴졌던 날들
글 입력 2018.09.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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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편식'이라는 말을 쓰기에,
편식은 왠지 내가 잘못하는 느낌이다.


몸에 좋은데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멀리하는 어조같다. 문학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수필이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많은 장르들 혹은 그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애호하는 것이 있을 터이니, 어떤 장르를 잘 접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학 편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감이 이상한 것도 같다. 그럼에도 편식이라는 단어를 붙인 건, 나의 경우 꽤 오랫동안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를 '일부러' 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일종의 ‘편식’이었음을 깨달은 건, 소설을 읽지 않아 놓쳤던 것들을 이제야 천천히 발견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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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귀찮았다

짧게 말하자면 귀찮았다. 소설에는 대화가 있다. 책을 통해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문장을 빨리 발견하고 싶은 나로서는 그 많은 대화는 그저 귀찮을 따름이었다. 어렸을 때야 또래 친구들처럼, 누구나 한 번쯤 읽은 유명한 전집이나 명작들을 물론 읽어 보았지만, 중고등학생이 되어 내가 ‘골라서’ 책을 읽는 때가 되자, 내 손에 들리는 건 소설보다는 수필들이었다. 고등학생 때 이병률 작가의 여행 수필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와 공지영 작가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시작으로 나는 도서관을 가나, 서점을 가나 수필 코너만 연신 기웃거렸다. 수필에는 혼자만의 대화가 담겨 있다. 독백이, 그 깊은 내면의 고백이 가득 담겨 있어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나는 그 수필이라는 모든 문장 하나하나에 마음을 주며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소설은 어려웠다. 귀찮기도 하고, 내게는 어려웠다. 그 모든 일상적인 대화들을 지나 마침내 주인공이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에 도달하기까지가 내게는 인내였고, 기다림이었다. 대체 극적인 사건은 언제 일어나는 것이며, 내게 울림을 줄 만한 대서사시는 어디쯤 등장할 것인가, 나는 소설의 페이지를 넘기고 넘기며 그 사소한 듯 보이는 대화와 매우 일상적인 행동과 묘사들을 '지나가야만' 했다. 가끔씩은 딱히 깨달은 것도 없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끝나 버리기도 했다. 수필은 그럴 일이 없었다. 바로바로 내면의 울림을 전해주므로. 모든 문장이, 내면에서 끌어올린 고백이자 깨달음의 연속이었으므로. 나는 수필의 그런 방식이 훨씬 편했고, 그렇게 소설이 아닌 수필만을 읽게 되었다.



궁금했다, 소설을 읽는 이유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궁금해졌다. 어떻게 소설을 재미있다고 읽을 수 있는 걸까, 나에게 소설의 사건들은 허구적으로 느껴졌고, 알맹이로 향하기 위해 계속해서 껍질을 벗겨내야 하는 수고스러운 장르였다. 그럼에도 소설을 끼고 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직접 물어봤다. 왜 소설을 읽느냐고, 수필과 달리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점이 무엇이냐고. 같은 과의 선배, 그리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직접 물어봤다.
왜 소설을 읽느냐고.

수필과 달리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점이 무엇이냐고.
같은 과의 선배, 그리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소설의 매력이 대체 뭐야?’


 


소설에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같은 과 선배에게 들은, 가장 인상 깊은 답변이었다. 수필에는 나 한 사람의 고백이 담기지만, 소설에는 주인공뿐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주인공이 틀렸을 수 있음을 제기하거나, 새로운 갈등 혹은 틈새의 기회가 된다. 즉, 수필에서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 계속해서 담기지만 소설의 ‘나’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감정의 스펙트럼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래서 수필 역시 좋아하지만, 나 혼자만이 존재하지 않는 ‘소설’을 더 많이 읽는다고 했다.

내가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귀찮게만 여겼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나 가히 일상적이기만 한 낱말의 주고받음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주인공의 ‘독백’을, 주인공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타인과의 접점이자 상호작용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수필을 더 좋아했던 것은 타인과의 대화도 좋지만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인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소설의 대화들을 의미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 없는 이유를 이때 깨달았다. 나는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지 않고,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그들은 분명 나의 의식과 내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가 더 이상 껍데기처럼 느껴지지 않은 건,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똑같다는 걸 깨닫고 난 이후였다.



자전적 소설을 읽기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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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외딴방>, 17쪽


그렇게 다시, 나는 소설에 대한 거부감을 내 나름의 깨달음으로 극복하며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시작은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이었다. 정말 고독에 사무친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내면에 깊게 파고드는 문장을 좋아하는지라, 다시금 읽기 시작한 소설 역시 ‘자전적 소설’이었다. <외딴방>에는 내가 아닌 내 주변의 인물들도, 그리고 꽤 여러 번의 대화도 드러났지만 그보다 그 모두를 바라보는 내 시선과 고백이 더욱 많이 담겨있는 듯했다. 수필을 좋아하지만 그 어떤 사건이나 타인의 등장 없이 오로지 누군가의 일기를 보는 듯한 형식이 무를 때쯤, 자전적 소설은 내게 소설과 수필의 중간 지점이었다.



소설은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소설은 불편할 수 있다. 나에게는 그랬다. 수필에 비해 깨달음이 직접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욱 많고, 너무나도 일상적이라고 느껴지는 대화와 사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관련 없는 듯한 풍경의 묘사 혹은 타인이 지나가며 던지는 시시껄렁한 언어 같은. 책이라는 거대한 한 세계보다, 작가의 문체와 숨결 그리고 문장 자체에서 직접 드러나는 울림과 깨달음에 골몰했던 나는 소설을 편식해왔다. 그리고 다시금, 소설을 집어 든 나는 그동안 내가 문학의 한 장르를 ‘편식’했음을 고백한다. 소설에는 분명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은 것들, 그리고 작가가 하나하나 그려낸 모든 사소한 순간들 모두가 한 세계를 이뤄내는데, 나는 이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문학을 편식했다. 여전히 수필도 읽지만, 소설을 예전처럼 의미 없이 읽지 않게 된 게 가장 좋은 점이다. 분명 다른 사람들은 감명 깊게, 울림 있게 읽어내는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를 왜 내 마음은 거부할까, 답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설이 가진,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많은 요소들이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진다. 주인공의 내면에 닿는 것이, 그리고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때로 어렵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책에 골몰하게 된다. 단지 누군가의 내면만이 아닌 한 세상 속의 사람을 바라보며, 때로는 이 세상 속의 나를 보듯 때로는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를 발견한 듯 읽어 나간다. 오히려 불편하게만 느껴졌던 그 모든 것들이 더욱 삶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남윤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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