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을 감아야지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블라인드 [공연예술]

글 입력 2017.12.31 23:5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17년 마지막 연극으로 대학로에서 본 ‘블라인드’. 크지 않은 소극장에 피아노와 현악기 라이브 연주도 들을 수 있는 연극은 언제나 보아도 참 좋다. 장님이라는 뜻을 가진 ‘블라인드 (blind)’ 연극은 2007년에 네덜란드에서 개봉한 영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상영되지 않았지만 동화와 같은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겨울과 어울리는 북유럽의 배경, 쓸쓸하고 잔잔한 정서와 맞는 연극 ‘블라인드’는 영화처럼 좋은 스토리와 캐릭터를 갖고 있었으나 약간의 아쉬운 점도 있었던 작품이었다.


movie_image981EZUQF.jpg


 
‘눈의 여왕’의 소재와 적절했던 줄거리와 캐릭터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삼은 이 작품은 후천적으로 눈이 멀게 된 주인공 루벤과 그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고용된 마리의 사랑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루벤은 눈이 멀게 된 후 세상과 단절되어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그 동안 루벤에게 책 읽기를 시도했던 사람들은 줄줄이 다 그만두게 되고 이 때 얼굴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마리가 일하게 되면서 루벤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손끝으로 세상을 보는 루벤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기를 싫어하는 마리와 아이러니하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나 눈을 뜰 수 있는 수술을 받게 된 루벤, 루벤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름다운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추한 마리를 떠나게 한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의 줄거리를 기억하는가. 연극 속 마리가 루벤에게 읽어주는 책이 ‘눈의 여왕’이었는데 이 동화에서는 오누이처럼 친하게 지내는 카이를 구하기 위한 게르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모든 것을 흉측하게 비춰주는 악마의 거울 파편이 카이의 눈에 박히고 눈의 여왕과 함께 살게 된 카이, 머리와 심장이 얼어붙어 게르다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따뜻한 사랑이 그를 녹이는 그런 이야기이다.


dfdf.JPG
눈의 여왕_키릴 첼루슈킨


 연극 ‘블라인드’ 초반부에서는 루벤이 카이처럼 보였고 책 읽기를 시도하는 마리가 게르다처럼 보였다. 마리가 루벤을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둘이 투닥투닥 몸싸움까지 벌리고 책을 읽어주는 과정 속에서 싹트는 그들의 사랑 감정이 루벤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자 초반에 느꼈던 생각과 반대로 마리가 카이로, 루벤이 게르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마리는 시력을 회복한 루벤을 떠나며 편지를 남기는데 그 편지 속에서는 그녀는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모습이 보이길 꺼렸지만 루벤을 통해 참 사랑을 알게 되었다” 라고 고백한다. 루벤이야 말로 마리 마음과 외모에 퍼진 상처를 온전히 사랑했던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길고 길었던 110분의 러닝타임

 워낙 유명한 명작인 덕분에 연극의 줄거리와 캐릭터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하지만 러닝타임이 비교적 루즈하고 길었던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극 초반은 몰입하기가 쉬웠다. 루벤의 비명소리와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 강력한 시작으로 극을 열었기 때문에 루벤의 캐릭터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비밀스러운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루벤을 경계하고 책만 읽어주고 떠나는 그녀의 마음 속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극 후반부까지 지나가야했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블라인드’ 작품의 주제와 메시지는 극 후반부에 있는듯하다. ‘사랑’과 ‘영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손끝으로 바라 본 세상이 더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완전히 신뢰하고 내면과 외면의 상처들을 안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메시지이다. 루벤과 마리가 서로 교감하는 장면들은 아름답긴 했지만 단편적으로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섬세한 감정들의 변화는 자주 등장하는 정적과 함께 너무 천천히 이루어졌다. 시간의 흐름을 라이브 음악연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연속적인 단순한 행위를 통해 그들의 사랑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쉽게 발견하기가 어려웠고 그들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순간은 연극이 거의 끝을 달려가고 있었다.

 영화를 연극화 할 때 공간과 시간의 제약은 항상 발생한다. 그 제약들을 하나의 공간에서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연극에서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연극은 시간의 흐름이 느렸다는 것이 필자의 평이다. 공간 같은 경우 필요한 공간을 적절히 배치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왔다갔다하는 장면이 많아서 조금 어지러웠던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을 빼고 본다면 추운 겨울날에 꽤 볼만한 작품이다. 특히 루벤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시각 장애인의 움직임, 동공 움직임까지 연습했다고 하니 연기력에 있어서 뒤처지지 않는 공연이었다.


movie_imageF04EL3L0.jpg
영화 속 루벤과 마리의 모습


 서로를 깊이 믿고 사랑했던 ‘눈의 여왕’ 속 카이와 게르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카이는 눈의 여왕이 준 숙제 ‘영원’이라는 단어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게르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영원’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게르다의 등장으로 그들은 함께 ‘영원’이라는 퍼즐을 맞춰갔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보이는 사랑과 영원을 만들어간다.  ‘블라인드’ 작품은 좀 더 현실에 맞춰져 있는 탓일까, 마리는 루벤의 사랑을 느끼지만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 그 사람의 허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부터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눈을 감아야만 비로소 보이는 삶의 본질들을 간과하고 남을 깊이 신뢰하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한 해의 마지막을 앞두고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연극이었다. 꼭 한 번 보기를 추천한다.


qmffldlsem.JPG

 
[김민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