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프레이폴(Pray for)] 5. for Women [영화]

'썸머타임: 아름다운 계절(La Belle Saison, 2015)'
글 입력 2017.12.08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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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타임: 아름다운 계절(La Belle Saison, 2015)'
_카트린 코르시니 作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의 누드화는 철저히 남성의 시각에서 다루어졌다. 고대 회화 및 조각에서부터 중세의 인물화까지 여성의 육체는 거푸집을 짜내듯 일정하게 주조되었다. 이상적인 비례를 가진 아름다운 신체와 일부터 형태를 지운 샅은 일종의 규격으로 고착되었다. 여성의 몸이란 신성하고 이상적인 것이었기에 그림의 대상은 신화나 역사 속 인물이어야 했다. 그마저도 남성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수단으로 변모해갔다. ‘비너스 푸디카’로 명명된, 가슴과 성기를 양손으로 가린 자세가 대표적이다(그림 1). 남성에 의해 창조된 그림 속 나신은 주체성을 잃고 탐욕스러운 시선을 억지로 표류해야 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아카데미적 관습에 반기를 드는 화가들이 등장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처음으로 여성의 나신에 음모를 그렸고, 에두아르 마네는 매춘부를 모델로 삼아 기존의 화풍을 혁신적으로 비틀었다(그림 2). 미술사적으로 인상주의로 접어드는 순간이었고, 여성의 누드는 신화와 회화에만 존재하는 신비의 대상에서 실존의 영역으로 재편되었다. 귀스타브 쿠르베에 이르러 여성 누드화는 더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사실주의의 문을 열어젖힌 그는 있는 은폐 없이 여성의 몸을 샅샅이 드러낸다. 여성의 성기만을 확대하여 그린 후 '세상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이거나, 두 여성의 정사 이후를 적나라하게 그리는 작업을 이어갔다. 여성의 누드는 따라서 제도와 관습을 혁파하고 시대를 바꾸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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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의 시도로 여성의 몸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돌려받게 되었지만,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마르셀 뒤샹 대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하고서도 남성의 관음적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처지였다. 즉 시대를 초월하여 여성은 약자였고 소수자였다. 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자기만족의 욕구보다는 역사가 빚어놓은 남성 위주의 성적 기준에 편승하는 것에 가깝다. 조개껍데기로 음모를 제거하던 고대 이집트의 여성들과 성형 수술로 외모를 다듬는 현대의 여성은 따라서 동일한 폭력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고질적 질병처럼 따라붙는 수 갈래의 시선과 끊임없이 상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내는 것이다. 특히 소수자들에게 인권은 결코 천부적인 것이 아니다. 스톤월 항쟁과 프라이드 퍼레이드, 워싱턴 대행진, 서프러제트(Suffragette) 등 숭고한 출혈과 희생의 역사를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시인 김수영은 4·19 혁명이 지나고 이런 시구를 쓴다.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 주체성을 얻기 위해서는 곧 피를 흘려야 한다. 부딪치고 투쟁하여 존재를 알리고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의 소수자성은 물리적인 이유가 크다. 남성과 육체적 조건에서 차이가 나 무턱대고 덤벼들 수 없다. 때문에 그들의 열기는 사소한 것으로 응축되거나,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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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파리에서는 여성들의 열광이 한창 번쩍이고 있었다. '거친 여자들'이라는 모임명은 그들이 어떤 단체인지 가장 잘 설명해준다. 길거리 남자들의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간다든가 낙태를 부정적으로 설명하는 학술회에 가서 훼방을 놓는다. 정신병원에 잠입하여 갇혀 있는 게이 친구를 구출해오기도 한다. 비록 여타 사회 운동과 비교하여 볼 때 치기만이 가득하지만 지향하는 지점은 뚜렷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 그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따라서 남자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당당해지고 싶은 까닭이다.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여성해방을 외치고 노래한다.


“여자들이여 수동적이고 치욕스러웠다네,
여기저기 팔리고 수치를 당했지, 
일어나라 해방된 여성들이여,
우리의 족쇄를 부수자”


  남부 시골 마을에서 농장 일을 돕는 델핀은 여권의 개념이 낯설기만 하다. 작은 공동체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특성상 여성은 묵묵히 남성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새벽부터 저물도록 매일을 쉬지 않고 일하지만 함부로 관련된 의견조차 내지 못한다. 집안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 마을을 통할하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모두 남성뿐이다. 여성은,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억눌렀다.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만이 삶의 미덕이라도 되는 듯 공동체는 여성을 부추기고 종용한다. 동성 연인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크게 격분하지 않고 망연히 떠나보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결국 여성의 삶에는 남자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압박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델핀에게 파리는, 거친 여자들을 이끄는 캐롤은 생경하면서도 근사하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물건에 갓난아이가 손을 뻗듯 델핀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들 모임에 참여한다. 단 한 번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권리를, 잠재된 주체성을 그들이 대변해주고 있었으므로 열띤 토론과 장난스러운 의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기만 하다. 자신을 견제하는 암묵적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에 델핀의 마음도 서서히 풀어졌다. 열심으로 모임 활동에 동행하고, 자연을 바라볼 여유를 가진다. 그것은 곧 자기 마음을 보게 된다는 것, 파리의 땅, 그곳의 열광과 개방, 주체성에 적응한다는 것이다. 이제 델핀은 늦은 밤, 버려진 막사 뒤에서 마음을 꺼내지 않아도 되었다. 캐롤을 향한 마음도 단김에 내어 보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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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정신적 교류를 나누는 플라토닉적 관계에 가까웠던 캐롤은 새로운 자극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빠져든다. 그것은 그동안의 여성 운동의 정점이자 놓치고 있던 목표인 것만 같다. 캐롤의 마음은 삭풍이 되어, 잃어버린 부분을 찾아 끼우기라도 하듯 델핀에게로 급격히 휘몰아친다. "해방된 여자란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이냐는 남자 친구의 조롱은 어쩌면 옳을 수 있다. 혁파와 변혁의 수단으로서의 여성 간 결합은 남성이라는 절대 권력으로부터의 탈피를 상징한다. 그 자체로 여성 해방이며 여성 운동의 실현이다.

  감독은 미장셴(Mise-en-Scène)을 통해 이러한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상술한 고야와 쿠르베 등의 회화에 빗대어 조형된다. 카메라는 나신을 꺼리거나 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를 포착한다. 억지로 꾸미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보이려는 시도이다. 아래 그림과 사진을 비교해보면 인위적으로 회화의 틀을 가져와서 표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1의 캐롤은 마하의 당돌한 자세(그림 3)를 취하고 있고, 사진 2는 쿠르베의 '잠'(그림 4)을 그대로 본 뜬 것 같다. 캔버스 위에 잠들어 있던, 시대의 변화를 이끌었던 여인들이 감독의 손을 빌어 스크린 위에 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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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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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여인들의 초혼(招魂)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결국 혁명의 정신이다. 그들의 사랑이 결을 더해 가면 사회를 바꾸려는 열망도, 권리에 대한 격정도 깊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파리의 개방성을 전제로 제시되는 것,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진 것을 계기로 같이 남부 농장에 내려와 살게 된 이후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토록 작은 공동체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의심과 경계, 나아가 혐오마저 그들 주위를 감싼다. 여권을 노래하는 자라고 해서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지리한 강요를 받아왔을 것.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델핀은 자신의 금지된 사랑이 탄로될까 두렵다.
 
  외풍으로 생긴 자그마한 틈은 점차 벌어져 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는다. 시대를 뒤흔들려던 계획은 그 작은 마을 하나, 심지어는 어머니의 마음조차 설득하지 못하고 끝나버린다. 그들은 여성에게마저 외면당한 여성 운동을 더 이상 자처하지 못한다. 이제 그들은 열광이 아닌 사랑으로 오롯이 관계를 치환하려 한다. 실패한 혁명가들은 파리 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실패를 기념하며 그들은 포옹하고,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덜컹덜컹 떠난다. 이 실패가 델핀에게도 적용되는 것을 몰랐으므로, 남부의 델핀에게로 회귀하게 될 것을 아직 몰랐으므로 그들은 맞잡은 손이 따뜻하기만 하다.

  완전히 깨어졌지만 그 해의 여름은 아름다웠다. 더없는 사랑으로 교류했고, 뜨거운 햇볕으로 서로를 가득 메웠다. 그들이 나눈 것은 권리였고, 주체성이었으며, 여성(女性) 자체였다. 뒤늦게 델핀은 용기를 내지만 시간이라는 열차는 한참을 떠나 있었다. 추억으로만 과거에 남아 있는 열기를 양분으로 각자의 삶에 뿌리를 내린다. 이전의 치기는 지워지고 차분하게 그들의 소명을 다한다. 마음을 쏟아내고 흔들리면서 그들은 식물의 줄기가 단단해지듯 성숙하고 견고해졌다.

  우리에게는 어떤 여름이 존재하는가.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대한 계절은 우리에게 어떠한 잎으로 돋아나는가. 기억의 단층 아래편 단단히 꽂혀 있는 그 짙은 나이테를 손으로 훑어본다. 여전한 녹음으로 군락을 지어 손짓하는 숲의 그늘로 걸어 들어간다. 그 아래 서 있는 나의 캐롤을 한달음에 달려가 세게 안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Google, 위키피디아

참고 문헌

「에로티시즘과 페미니즘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누드화에 대한 고찰 : 본인의 작업을 중심으로」,
박현진, 학위논문(석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 미술학과 회화전공,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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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범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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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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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Y
    •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가는 글이네요. 여성은 늘 약자였고 이제는 그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동적인 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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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
    • 안녕하세요. 12기 에디터 손진주입니다. [프레이 폴]시리즈는 평소에도 즐겁게 읽고 있었는데, 두레로 또 다시 뵙게 되었네요. 여성과 남성을 넘어, 젠더관련 이슈에 관해서는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저는 에디터님의 이번 글이 구조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구도를 여성 누드의 구도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적절합니다. 저번 두레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강범석님만의 감성이 잘 녹아든 표현들도 읽는 즐거움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즐겁게 읽은 글에 관해서 더 할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두레의 취지에 맞게 몇가지 지점을 이야기 해보자면, 에디터님께서 그대로 카피해서 쓴 것도 아니고, 에디터님이 이해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쓴 글이라면 이런 opinion에 참고문헌이 굳이 들어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논문과 연구계획서 같은 학술적인 글이라면 참고문헌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만, opinion은 개인의 생각을 써내려가는 다소 가벼운 목적의 글이니까요. 에디터님만의 원칙과 이유가 있다면 이런 점에 대해서는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다소 구조를 맞추려하다보니 '영화' 그 자체보다 '화면이나 그림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구도'에 초점을 맞춰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즐겁게 읽은 글이었지만, 다소 두 주제가 함께 존재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프레이폴] 시리즈가 젠더이슈를 중심으로 영화를 소개한다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에디터님의 지식을 잘 정리해 '여성의 구도'에 관해서는 아예 주제를 빼서 쓰셨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즐겁게 읽은 글에 감사드리면서 ^^ 앞으로도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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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
    • 2017.12.29 22: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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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제 글을 누가 읽어주기나 할까, 의기소침한 구석이 있었는데 진주 님께서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신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읽어주시는 데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더 좋은 글로 진주 님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외람되지만 전해주신 의견에 관한 생각을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opinion, 즉 이 글 자체와 글의 목적, 취지에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오피니언이 문화 전반을 다루다보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다소 가벼운 글일 수 있겠습니다. 글을 읽으시는 많은 분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글을 원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퀴어 영화 비평이라는 주제를 고르면서부터 가벼운 마음으로는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글에 주관을 담는 것을 굉장히 꺼리기도 하고, 주제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제 오피니언이 전반적으로 딱딱하고 건조해지는 것 같습니다. 또 말씀해주신대로 젠더 이슈라는 것이 꽤 민감한 소개이기에 사견보다는 전문성을 띄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글마다 논문 등을 참고하는 이유이고, 저만의 언어로 다듬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글에서 얻어온 내용이기에 참고 문헌을 표시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과제 하던 습관이 아직 남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네요...ㅎㅎ)
      '프레이폴'은 성소수자를 중점적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결국은 영화 비평에 가깝습니다. 저 또한 기획이나 글 작성 과정에서 여전히 고민을 하고 있는데 결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 화면이나 구도, 즉 미장셴에 주목한 것도 그러한 부분으로 접근이 가능합니다. 저는 회화의 틀을 본딴 영화의 구도가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곧 영화의 주제와 연결된다고 봤기에 그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서술했습니다. 저에게는 그 주제가 가장 큰 젠더 이슈였고요. 영화 자체가 남성을 배제한 여성의 결합, 여성의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에 더욱 그렇게 읽히기도 했습니다.
      사족이 길어졌습니다. 다시 한 번 소중한 의견 감사하고, 제가 혹시 잘못 이해했거나 과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씀해주신 내용 마음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새해에도 늘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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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매나무
    • 안녕하세요. 두레 참가 중인 김소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동안 한 번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글에 집중할 수 있을만큼 흡입력있는 글이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요. 또 저에게는 처음 접하는 영화와 잘 알지 못하는 미술사의 이야기라 자칫 딱딱할 수 있었는데 내용이 부드럽게 이어져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범석님 특유의 감성이 전문적인 내용과 어우러져 딱딱함을 중화시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단, 여름에 대한 글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여름의 느낌과 영화가 주는 느낌, 그리고 에디터님의 감상이 자연스럽게 합쳐져 오래 기억에 남을듯합니다.
      정말 인상깊게 읽은 글이라 아쉬운 점, 제안할 점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한가지를 꼽자면, 앞선 답댓글에서 영화비평에 가까운 글이라고 하셨는데 글 앞부분에서 미술사의 비중이 커서 그런지 영화비평의 느낌은 조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하지만 에디터님이 영화비평으로 읽히길 바라신다면 앞쪽의 미술사 비중을 살짝 줄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두레 덕분에 좋은 글을 읽게 되어서 기쁩니다. 앞으로 쓰시는 글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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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찬규
    • 안녕하세요. 두레를 통해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먼저, 'pray for'이라는 제목을 볼때마다 너무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위한 기도를 매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멋진 제목과 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글에 감상을 말씀드리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영화와 그림이라는 통로를 통해 잘 담아내셨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놀랐던 것은 영화의 장면과 그림의 연결점을 발견하는 시각이었습니다. 누드화에 그 시대의 여성의 위치가 드러나있다는 것은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이용해 다른 것을 해석해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알고있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제가 그렇습니다).

       시각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개인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시각과 이야기가 그 자체로 가치있다고 생각하기에 에디터님의 시각 역시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각을 말씀하신 이유에 부합하지 않는 대답일거라는 걱정이 들지만 제 개인적인 가치에서는 이렇게만 말씀드리게 되는 것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피드백을 적기 위해 여러번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쓰신 글이 곱씹어보기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단편적인 지식과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지만 여러번 읽다보면 글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글은 참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한번의 시각으로는 글의 중심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 읽었을때는 흥미로운 퍼즐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즉 완성되지 않은 해석이었다는 것이죠.
       물론 모든 글이 한번에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한번에 읽히는 글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피니언 역시 한번에 읽혀야 하는 필요가 있는 글들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절대 단점이거나 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한번에 읽혀야 하는 글을 쓰셔야 할 날이 오신다면 그때 한번쯤 생각하셨으면 하고 감히 의견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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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onnnah
    • 안녕하세요 12기 에디터 손은아입니다
      답글에 앞서서 두레 답글 기한을 엄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범석 에디터님의 이번 글이 저에겐 매우 반가웠어요 여성들의 누드화를 통해 바라본 여성의 인권 변화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6년 10월부터 여성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책도 이것저것 읽어보고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도 구독해 읽곤 했죠 범석님의 이번 글은 정말 물 흐르듯이 읽혀지고 부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부분도 없었고요 그리고 마무리하는 문장도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늘, 나이테, 그리고 '세게 안는다'라는 문장.. 모든 단어들과 문장이 아름다웠어요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글의 행보를 지켜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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