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거리, 그들이 가지는 현대사진의 가치와 방향에 대하여

글 입력 2017.10.2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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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구경거리 텀블벅


여기 네 명의 사진가가 있다. 그들은 어쩐 일인지 그들의 작품을 구경거리로 전락시켰다.
 
일반적으로 ‘구경거리’라는 단어는 동네 개들의 싸움이라던지, 옆집 아저씨의 술주정처럼 사소하고 볼 일 없는 것들을 의미한다. 반면 ‘작품’은 음악가의 음악, 화가의 그림, 소설가의 소설, 사진가의 사진처럼 희소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말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두 단어는 보통 한 문장 안에서 양립할 수 없다. 고작 구경거리 정도의 작품을 누가 보겠느냐는 말이다.
헌데도 이 사진가들은 그들의 ‘작품(사진)’을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이토록 다른 두 단어가 양립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상식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둘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실마리는 두 단어에 있다. 이것은 언어가 사회를 반영하는 문화와 관습의 산물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즉, 표기가 같더라도(Significant) 시대, 문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변한다는(signifié) 것이다. 특히 요즘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져 단어가 본래의 의미와 완전히 다르게 쓰이기도 하는데, 가령 답답한 일이 해소되는 것을 ‘사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 사례다. 작품과 구경거리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하게 두 단어의 의미로 해석하기 보다는 그 배경을 살피고, 그것이 이끄는 새로운 의미로 우리의 생각을 확장 시켜야 할 것이다. 단, 작품을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구경거리를 구경거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구경거리가 가지는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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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세상, 변화하는 미술

먹고 사는 문제에서 어떻게 먹고 사는지가 중요해진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삶에 의문을 품고, 더 나은 삶을 넘어 다양한 방식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누구는 페미니즘을 외치며 사회와 싸우고, 누구는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며, 누구는 욜로(YOLO : You Live Only Once)를 외치며 행복하게 오늘을 산다. 아름다움을 쫓으며 예술을 추구하는 것도 이런 삶의 방식 중 하나다. 물론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지만, 이것이 좀 더 특별한 이유는 사람들과 미술의 변화에 있다.
 
캘리그라피, 포스터, 스케치, 만화, 사진, 판화, 프린팅
 
이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미술의 영역인 동시에 상품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상품들은 과거부터 있었으나 구태여 주목하는 이유는, 오늘날 미술이 ‘소비’되는 문화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딱 이름만큼의 역할을 했다. 스케치는 완성되지 못한 그림, 캘리그라피는 작품의 부수적인 역할이었고, 사진은 인화지나 엽서로 나오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의 변두리에 있던 이것들이 ‘작품’으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값도 저렴하고, 원본이 아니고, 완성도도 낮지만, 액자에 걸리고 집안을 장식한다. 뿐만이 아니다. 이것들은 다시 한 번 경계를 넘어 ‘상품’이 된다. 색칠도 하지 않은 스케치가 핸드폰 케이스를 장식하고, 캘리그라피가 엽서가 되고, 사진은 장르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제품에 적용된다. 심지어 미술은 그저 제품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할 뿐, 작품의 주인공은 미술이 아니다. 그저 제품만큼의 역할을 하고 버려진다. 소비되어버리는 것이다. 모나리자도, 선 5개로 그린 사람 캐릭터도 캔버스가방에 프린팅 되는 순간 상품의 가격, 딱 그 만큼의 가치로 소비된다. 그렇게 지금, 변두리에 있던 미술은 작품이 되고 상품이 됐다. 
 
변화는 잔잔한 호수에 일어난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미술관에서는 작품이라고 부르기 애매했던 것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아무렇게 그린 낙서(위대한 낙서 전(展)), 심심할 때 공책에 그릴 법한 그림(데이비드 슈리글리 전(展)), 원화가 아닌 프린팅이나 모니터 화면 자체(모네 빛을 그리다 전(展)) 등 생활과 친근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었다. 미술시장 역시 변화를 겪는다. 갤러리나 아트페어가 아닌, 가까운 도심에서 저렴한 작품을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시장이 만들어졌다. 사람들과 작품의 벽은 낮아졌고, 이제 작품이라는 존재는 더이상 사치가 아닌 취향으로 자리잡았다. 과거 작품의 의미가 고급스런 원목 가구처럼 오래 두고 버리지 않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스웨덴에서 들어온 조립식 가구처럼 가구이긴 하지만 필요할 때 쓰고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존재가 됐다. 미술작품은 희소성과 권위를 잃은 대신 사람들의 곁에서 생활과 어우러지는 새로운 의미를 얻은 것이다. 
 
고급 문화와 대중문화, 작품과 상품의 경계가 모호해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스케치나 프린팅같은 것들을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물론 어떤 사람은 예술에서의 숭고함이나 정신성을 운운하거나, 그동안 예술계가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만들어낸 일방적인 이유로 이것을 미술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이 모든 것을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이다. 그 이유는 전통적으로 ‘미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미술가는 직업이다. 가난의 다른 말이 아니며, 엄청난 인내 끝에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놀라게 만들어야 하는 위인이 아니다. 미술가는 작품으로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해야한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원화의 경우 대부분 비싸고 알려지지 않으면 수요가 없는 탓에,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현실이다. 때문에 대다수의 미술가들은 다작을 통해 위험부담을 줄이고, 인쇄를 하거나, 트렌드를 반영하고, 작품과 상품을 결합하는 대중적인 작가의 길을 택한다. 자연스럽게 조건에 맞는 일러스트, 사진, 펜화, 포스터 등의 장르는 득세하게 됐고, 오늘날 많은 미술가들은 이런 작업물을 만든다. 사람들은 미술가에게 엄청난 수준의 작품을 요구하지 않고, 작가들도 애써 사사로운 부분들을 설명하며 작품의 권위를 강요하지 않는다. 양쪽 모두 필요한 만큼의 예술을 소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변화했고, 미술가와 미술의 기준도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를 운운하며 이들이 미술가가 아니라고 하는 말은, 오히려 독단적인 잣대로 지금껏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변화해온 미술을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요컨대 지금의 미술은 가치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쌓이고 쌓여 많은 사람들이 미술이 생활 속에 자리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또 필요로 하게 됐다. 사람들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고귀함과 권위에 의문을 품진 않았지만, 스스로 다양한 미술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사람들의 취향을 대변하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됐다. 


카메라(photography)의 무게
 
사실 이런 변화에 가장 앞장서는 분야는 ‘사진’이다. 아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만이 가지는 아름다움과 작가의 시선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헌데 사진은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또 다른 열쇠를 가지고 있다. 카메라만 있다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의 발전과 맥락을 같이 하는 카메라의 특성에 기인한다. 오늘날 카메라의 성능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가격은 저렴해 졌고, 고성능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이 상용화됐다. 덕분에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그것도 아주 마음껏. 특히 SNS는 사진을 온라인상에 자신의 사진을 올리고 공유하도록 만들어 멋진 사진을 뽐내고,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사진을 사용할 곳과 그 사진을 보는 관객을 동시에 얻었다. 사진을 찍는 문화는 점점 더 발전했고, 이제 우리는 카메라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 사진가들의 불안으로 이어졌다. 200년 전쯤 카메라로부터 시작된 예술가의 두려움은 과거에도 한 차례 있었다. 카메라가 만들어지기 전, 시각예술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대상을 표현하는 기술(skill)이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정확한 묘사는 표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특히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풍경화가나 초상화가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카메라는 기술의 벽을 낮췄다. 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든 대상을 사실적이고 심지어 (회화에 비해)빠르게 묘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프랑스의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는 회화의 종말을 선언했고, 다른 화가들 역시 사진을 두려워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회화의 자리는 굳건했다. 회화가 가지는 기술의 벽이 높았을 뿐 아니라, 사진이 볼 수 있는 것만 담을 수 있었던 반면 회화는 생각하는 것을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회화와 사진이 분리되어 각자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각자의 방향이 달랐던 것에서 해결점을 찾은 것이다.
그로부터 200년 뒤인 오늘날, 카메라가 가져오는 위기는 부메랑처럼 큰 원을 돌아 회화 작가가 아닌 사진가들에게 찾아왔다. 사진가로서의 입지가 불안해진 것이다. 누구든 찍을 수 있다는 말은, 잘 찍는 사람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배우지 않고도 멋진 사진을 찍으며 SNS에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다. 덕분에 사진가들이 차지했던 직업의 자리는 더 좁아지게 됐고, 이에 사진가들은 200년 전 화가들처럼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이미지로 작가로서의 입지를 유지하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헌데 똑같이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해결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사진가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사진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어떤 사람은 원본이 무색할 정도로 편집을 한다. 어떤 사람은 독특한 소재를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표현한다. 그렇게 ‘사진가스러운’ 작품을 만들며, 각자의 생각으로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고, 이를 통해 사진가로서의 입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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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황예지 홈페이지


‘구경거리’ 역시 과도기의 수많은 장면 중 하나다. 헌데 그들의 ‘사진가스러움’은 조금 달라 보인다. 그들은 아마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듯하다. 
 
“만약 ‘작가’라는 존재와 카메라를 가진 보통 사람이 유리되었을 때, 비로소 작가는 작가로서 존재하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아마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고,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급급한 상태로, 속은 비어 있는 채 부피만 늘리고 있는 사진가들을 봤을 것이다. 긴 고민 끝내 그들이 내린 결정은 ‘작품’을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작품’이 ‘구경거리’가 된 맥락은 여기에 있다.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이미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사진이라는 영역을, 구태여 사진가들의 것으로 치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미 그 둘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작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생각만 있다면 당신들도 사진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작품을 누구나 만들 수 있는 흔한 구경거리로 만들고, 스스로도 누구든 될 수 있는 구경거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카메라와 사진이 가지고 있는 단어의 온전한 무게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마치 사진이 보이는 그대로의 빛을 필름에 담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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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이수안 홈페이지


이러한 점에서 ‘구경거리’가 가지는 함의는 두 가지다.
첫째, ‘구경거리’는 거대한 세상에 흡수되는 것이 아닌 더 넓은 맥락으로 나아간 것이다. 즉, 사진가와 사람들의 ‘경계 지우기’가 사람들에게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식의 착해 빠진 소리나, 존재감이 없어지기를 원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진가라는 울타리 마저 벗어나 거대한 맥락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들이 할 수 있고 하고싶은 이야기를 담겠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스스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사진가 ㅇㅇㅇ’ 이 아닌, 온전하게 그들의 이름 석 자 이수안, 황예지, 하혜리로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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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하혜리 홈페이지


둘째, ‘구경거리’는 더 넓은 세상에서 바라본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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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이 치혈하던 시절, 그들은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핵으로 무장하고 각자의 군사력을 증진시키는데 혈안이었다. 그 중 로켓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서로의 국가에 핵을 떨어뜨릴 수 있는 수단으로, 양국이 가장 역점을 두고 개발하는 무기였다. ‘아폴로 11호’도 그 군비경쟁의 일환이었다. 로켓을 쏘아 달로 보내는 기술과, 핵무기를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국가로 날려보내는 것이 같은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힘을 과시하기 위해 로켓을 달로 보내기 위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쏟았다. 마침내 미국이 아폴로 11호를 달로 보내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달에 도착해서 본 지구의 모습은 아주 푸르고 아름다운 점이었다. 그 점 안에서 미국과 소련은 싸우고 있던 것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들의 싸움이 얼마나 의미 없는 싸움이었는지 알아버린 것이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군사경쟁의 일환이었지만, 뜻밖의 선물을 줬다. 
“
지금의 사진계가 포화상태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하나의 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지금의 사진가들의 일부는 단지 사진을 다루는 일반 사람들과 반대로 사진가의 영역을 만드는데 몰두하는 흑백논리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더 밖으로 나와 바라보면 사진이 갈 수 있고, 가야 할 방향은 무한하다. 인간의 상상력과 예술은 무한하니 말이다. 구경거리가 의미 있는 것은, 이 방향이 다시 사람들을 향하기 때문이다. 사진예술의 부흥일까? 아니면 후퇴일까? 이것이 사진이라는 생태계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눈 여겨 볼만한, 다른 흐름임에는 틀림없다.
 
 
변화의 경계에 서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의 저자인 고대 로마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우주의 무한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허공에 화살을 쏠 것을 제안한다. 날아간 화살은 어딘가에 꽂힐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 화살이 꽂힌 경계위에 서서 다시 화살을 쏘는 것이다. 우주가 무한하다면 이것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고, 유한하다면 화살이 마지막으로 박힌 곳이 우주의 끝일 것이다. 
 
사실 우주에는 끝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짐작할 뿐 누구도 끝을 보지 못했다. 우리가 겪는 변화 역시 시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끝이 없다.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는 한 지금의 변화는 늘 중간일 뿐이다. 구경거리가 만들어가는 변화도 마찬가지다. 그저 수많은 변화 중 하나다. 때문에 ‘구경거리가 변화의 시작이다!’라는 식의 거창한 이야기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경계에 있다. 예술이라는 수없이 많은 변화의 화살이 우연히 꽂힌 그 곳에 있다. 구경거리는 한 손엔 활을, 다른 한 손엔 경계에 꽂혀 있던 화살을 들고 있다. 이제 화살을 허공으로 겨눴다. 활시위를 당겼고, 놓았다. 위도, 아래도, 중간도, 끝도 없는 변화의 한복판을 그저 날아가고 있다. 
 
이들이 쏜 화살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홀로 우주의 끝을 향해 쏘는 한 걸음일수도, 혹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후퇴일수도 있다. 하지만 꽂힌다면 그들은 다시 그 자리에 설 것이다. 그리고 화살을 쏠 것이다. 관대한 우주는 단 한 순간도 우리에게 끝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


[공정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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