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 아직도 남아있는 이 흉터가 아픔의 행방을 묻고 있다.

2017.08.20 3.
글 입력 2017.08.2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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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모래밭


학교가 끝나고
학원도 끝나면
저녁을 먹기 전까지 시간이 남는다.

그 때엔 자유시간이 주어지고,
약속하지 않아도 모두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곤 했다.

가장 좋아했던 놀이 중 하나는
모래가 잔뜩 있는 씨름장에
모래성 마을을 만드는 놀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핵심은 강이었는데,
언제나 모래성들을 감싸 흐르며
가장 큰 궁전 앞 호수까지 다다르게 설계했다.


손발과 작은 삽과
어디에선가 주워온 종이컵과 나뭇가지를 동원해
열심히 수로를 파고,

어디에선가 주워온 페트병에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
10번도 넘게 모래 수로에 물을 부었다.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모래성을 감싸 흐르는 긴 강은 절대 채워지지 않았다.

온 주변의 모래가 젖을 때까지 물을 붓다 보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래야 내일 또 놀 수 있으니까.
모래성 놀이는 내일 또 하면 되니까.






#12 흉터


내 왼손 검지 옆에는
2cm의 긴 흉터가 하나 있다.

가까이 들여다 보아야 티가 나는 흉터라
나조차도 잊고 있을 때가 많다.

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알았을 즈음에 생긴 흉터인데,
큰 유리조각이 박혔었던 것 같다.

내 기억엔
너무나 아파서 울면서 엄마에게
손을 보여준 기억뿐이다.

아팠다는 순간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아팠다는 감각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 아픔은 어디로 간 걸까
오래 되어서 잊어버린 건지

아직도 남아있는 이 흉터가
아픔의 행방을 묻고 있다.






#13 송충이


그 길은 악명이 높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원한 가로수가 심어진
평범한 인도이지만
가까이 보면 그곳은 송충이 밭.

매일 아침 교실엔 송충이 목격담과
누구의 머리 위에 송충이가 떨어졌는지의
뉴스가 쏟아지곤 했다.

하루는 나에게도
그 길을 지나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언제 어디서 꼬물거리는 송충이가 떨어질지 몰라
겁에 질린 채 인도의 끄트머리로 걸어가는데,

우연히 내려다본
내 발 바로 옆의 하수구 안에는

그 안을 가득 채운 몸집의
거대한 주황색 송충이가 있었다.

나는 울면서 뛰어갔고,
거대 송충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
그 가로수 길을 더더욱 공포의 길이 되어버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큰 크기의 송충이였는데
환상이었을까?

누구나 가지고 있을
공포로 만들어낸 환상 말이다.






#14 아이


놀림을 받던 아이가 있었다.

놀림의 이유는
보통의 남자아이 같은 외모에 반바지인 원복을 입었지만,
긴 머리를 가졌다는 것.

놀림의 구호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중성이래요~


아이는 놀림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장실까지 쫓아간 끈질긴 악마들은
아이의 성별을 알았겠지만
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집에 돌아가는 길.

친구가 없는 아이들은
셔틀버스 앞자리에 앉곤 했다.

내 옆에 앉은 아이.
며칠 전부터 해오던 고민.
말을 걸까 말까.

긴 고민 끝에 아이는 내리고 있었고,
다급한 나의 한마디.

‘나는 너가 좋은 애인 것 같아.’

내리던 너가 웃으며 한 한마디.

‘고마워’

그 날 이후로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다.

하루만 더 빨리 말을 걸었더라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친구가 되었다면 아이를 계속 볼 수 있었을까

늦은 나에 대해 원망을 해보았다.






#15 바다


나는 바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억 속 첫 바다는 여름날의 해수욕장이었다.

바쁜 부모님 탓에 큰 이모네에 잠깐 머물던 날들에,
어쩌다 보니 잘 모르는 식구들까지 함께 바다에 가게 되었다.

사촌 언니와 오빠는 아는 아이들이었지만,
난생 처음 보는 아이들과 물에 들어가 어울리기란
작은 나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시끌시끌한 해수욕장에
뜨거운 햇빛에
왠지 멍해지는 기분에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모래사장을 따라 걸었다.

사람이 조금 뜸해진 즈음에
발 밑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챘다.

쭈그려 앉아 가까이 살펴보니
그림책에서만 보던 불가사리였다.

하얀 모래사장에 대비되는
빨갛고 파란 불가사리가

이곳에 어색함을 느끼는 나 같아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잡아 물속에 던져 주었다.

그 기억의 끄트머리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바다엔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이 든다.






전문필진 명함.jpg
 



[정연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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