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종종 꺼내 보고 싶은 기억, 무언극 < 이불 >

글 입력 2017.05.30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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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꺼진다. 고운 피아노 가락이 흘러나온다. 한 아이가 상자를 뒤적인다. 몸은 어른이지만, 표정은 왜인지 아이 같다. 장난감을 꺼내 들고 말한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
엄마 아빠는 늘 돌아누웠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홍수가 나기 전까지는...

어느 날, 커다란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떠내려갔다.

자고 있던 엄마 아빠도
물살에 휩쓸려 멀리멀리 떠내려갔다.
달랑 이불 한 채와 함께...


엄마 아빠는 정말로 돌아누워 있다. 엄마 아빠가 돌아 누운 이유는 사슴 때문인 것 같다.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면, 심장이 철렁 가라앉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돌아 누운 엄마 아빠 위에 이불이 놓인다. 이불을 덮은 엄마 아빠의 집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엄마 아빠 모두 입을 뻐끔뻐끔하며 헤엄을 친다. 머리까지 물에 잠기고 나서야 출구를 찾은 엄마 아빠는 밖으로 나와 푸 하고 숨을 뱉는다.





 배우들이 말 없이 몸짓과 표정으로만 연기를 하는데도, 연극을 보는 내내 나는 행복했다. 아마 연극을 보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극이 시작하면서 나오는 피아노 연주부터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노래가 기억나지 않아서, 내 마음대로 다른 음악을 들으면서 기억 속, 상상 속을 더듬어 가고 있다. 이상하게 내용은 분명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때의 행복했던 감정만은 생생하다. 어쩌면 말이 주는 피로감에 지쳐 있었을까? 말을 정리해서 가다듬은 글 또한 나에게는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 이불 >을 떠올리면, 글이 주는 피로감도 줄어든다. < 이불 >은 내 상상이니까, 두서가 없을 수도 있지.

 정말로 말이 없던 한 시간이 이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었다. 외국 영화를 보면 집중이 잘 안 되는 이유랑 비슷했던 것 같다. 자막을 보느라고 화면에 집중하지 못했었는데, 연극도 그랬나 보다. 물론 보통은 말과 버무려져야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 대사가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 이불 >은 그야말로 무언극에 딱 알맞은 내용이었다. 특별히 마임이스트에게 주기 위해 극본을 집필했다는 이강백 작가의 큰그림에 그의 연륜이 느껴졌다. 또 표정과 몸짓만으로 말보다 더 생생한 감정을 전달하는, 마임이라는 장르에 굉장히 큰 호감이 생겼다. 말이 없다는 점이 이렇게 큰 매력이었구나, 싶었다.

 이불, 사슴, 물, 무인도. 이 소재들의 개념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긴 하지만, 이들로 인해 펼쳐지는 세상은 온전히 우리의 상상이다. 사실 줄거리라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집중하게 된 것은 두서 없이 펼쳐지는 그 상황, 상황에 대처하면서 그것을 실재로 만드는 배우들의 몸짓이다. 그들의 손짓만 보고 있어도 내 머릿속에 하나의 세계가 세워지면서, 빈 무대가 꽉 차는 기분이 들었다. 또 상상을 현실의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일등 공신인, 생생하고 다양한 소리들. 어찌나 몸짓과 합이 척척 맞던지, 처음에는 MR인줄 알았는데, 계속 보니 모두 직접 연주하는 소리였다. 신선하고 귀여워서 많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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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 나는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행복의 여운에 젖어 있었기에, 용기를 내서 질문을 해 보았다. 내가 너무 행복했던 이 꿈 속에서, 배우들에게 어떤 기분이었냐고 물었다. 웃고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보면서 행복했었다는 대답도 있었지만, 이두성 배우는 사실 판토마임이 낯선 장르라서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역시 일이기 때문에 긴장도 많이 되었다는데 관객인 나로서는 전혀 그런 느낌 없이 그들의 몸짓을 통해 극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었던 효과음, 음악들도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탄생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의진 배우는 할 줄 아는 악기가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도 굉장히 맛깔 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하고 심지어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화가 오가고 얼마나 많이 합을 맞춰 보았을까.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다는 것이 실감났다.

 이처럼 극한의 노력이 있었기에, 작품은 역으로 관람자에게 너무도 편한 마음을 제공한다. 참 감사한 일이다. 부부가 이불을 덮은 순간부터 관객들도 그들이 이끄는 대로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을까? 내 상상은 나만의 것이지만, < 이불 >이 보여준 상상은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극장에서 사람들과 둘러 앉아 따뜻한 기분을 느끼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괜히 친근해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 기분을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아마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꿨던 이 꿈이 굉장히 그리워질 것 같았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나는 이 곳에서 말 없고 두서 없고 경계도 없는 상상의 세계를 선물 받았다. 심심할 때, 마음 속에 사슴이 나타났을 때나 무기력할 때 혹은 정말 기쁠 때에도 꺼내 볼 수 있는, 소중한 선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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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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