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흐르는 강(江)의 진리 : 『싯다르타』 [문학]

글 입력 2017.01.1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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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삶을 ‘알’에 비유하고 하나의 알을 파괴해야 다음 생이 있다고 말한 작가가 있다. 우리에게는 『데미안』으로 익숙하고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헤르만 헤세다. 독일 태생의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성장에 대한 성찰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양면성을 주로 다뤘으며, 동양의 철학 사상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인도여행을 통해 유럽인들이 지니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 실재하는 동양의 모습을 주시했다. 단순히 동양의 나라, 문화가 진보되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와 전통을 가진 나라, 또한 서양과는 다른 철학과 관습을 가진 나라로 인정하고 이해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싯다르타』는 그가 동양을 특히나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해 잘 이야기하는 동시에 헤세 스스로가 진리의 깨달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말한다. 헤세 스스로가 말했듯이 진리는 누군가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소설 속 화자인 ‘싯다르타’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화자 ‘싯다르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붓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화자인 ‘싯다르타’와 ‘붓다’는 별개의 인물이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강’은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예컨대 『수레바퀴 밑에서』나 헤세의 대표작 중 하나인『유리알 유희』는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강’의 존재는『싯다르타』에서도 역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흐르는 것의 진리. 헤세는 ‘강’의 순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음은 작가인 헤세가 왜 두 명의 싯다르타를 사용했는지, 헤세가 말한 강(江)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탐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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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다음 이미지) 


1. 두 명의 싯다르타

 ‘싯다르타 Siddhartha’는 산스크리트어이며 ‘목적을 달성한 자’란 뜻을 갖고 있다. 싯다르타는 실제 생존하였던 부처의 실제 아명인 동시에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즉, 소설 속 두 싯다르타는 동일인물이 아닌 별개의 인물인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작가는 왜 독자의 혼동을 각오하면서까지 이 이름을 사용한 것이며, 소설에서 동명의 주인공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했는가에 있다.

 『싯다르타』는 형식상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의 구조상 3단계로 나눌 수 있다는 데에 많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예컨대 박광자의 경우 싯다르타의 성장을 헤세의 ‘인간 형성의 삼 단계’에 따라 세 단계, 정신-감성-종합으로 나누어 고찰했고 황진의 경우 수련기-방황기-성숙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살펴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세속의 삶을 산 전기의 모습과 출가하여 종교적 길을 걸어간 것으로 전해지는 후기의 모습이다. 세속의 계급으로는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샤카족의 왕자로 태어나 16세에 결혼하였으며 29세에 출가했다. 출가 이후 6년의 동안의 고행이 있었으나 고행이 참된 수행의 길이 아님을 알고 그만둔 뒤, 보리수 나무 밑에 정좌를 하고 명상을 하였다. 이때 마왕의 유혹과 공격이 있었지만 모두 이겨냈다. 마침내 36세에 득도 하였으며,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이를 전파하는데 주력하였고, 후에 열반하였다.

 반면, 소설의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부처와 비슷하지만 큰 차이를 나타낸다. 화자 싯다르타는 먼저 인도 고대 종교의 수련의 길을 떠나 사문들과 고행을 하고, 고타마와의 만남 이후 또 다시 길을 떠나 앞선 길과는 다른 세속적 세계 속에서 향락과 사치, 부를 누린다. 이러한 세속에 섞여 지내던 끝에 강을 찾은 그는 옴의 소리를 들으며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이를 부처의 실제 생애와 비교해보았을 때 소설은 정신이나 종교적 수행만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소설은 인간의 삶에 있어 다양한 체험을 한 뒤의 단계에 해탈을 배치함으로써 수행만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소설에서 작가인 헤세가 가장 중요한 장치로 설정해둔 것은 실제 존재하였던 석가모니를 소설 속에서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부처가 아니며, 부처가 되지도 않는다. 결국 이 장치는 석가모니와 주인공 싯다르타가 직접 대화를 나누게 함으로써 작가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정리해보면 소설 속 화자인 싯다르타는 작가인 헤세인 것을 말한다. 화자 싯다르타를 통해 헤세는 부처에게 묻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헤세는 깨달음이란 모든 개개인이 내면의 길을 가서 얻는 것이지 부처의 가르침을 배워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컨대 헤세는 싯다르타가 고타마와 나눈 대화를 통해 깨달음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 싯다르타는 석가가 깨닫는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개인들에게 이는 말이나 가르침을 통해 전달할 수 없음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인 헤세는 두 명의 싯다르타를 통해 깨달음이란 누군가 깨우쳐주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깨닫는 다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일이고 개인의 깨달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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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다음 이미지) 


 2. 흐르는 강(江)의 진리

 흐르는 물과 관련된 장소들은 헤세의 소설에 있어 공간적 배경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레바퀴 밑에서』나 헤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유리알 유희』에서는 마지막에 이르러 강과 호수가 나온다. 이는 상징하는 의미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의 죽음의 장소로 표현된다. 싯다르타 역시 삶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그 순간 옴의 소리를 듣게 된다. 이 강은 싯다르타가 지내온 인물들의 삶 등에서 발견한 불만과 실망, 의문 등에 대한 해답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절망의 절정에 놓여있던 싯다르타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은 ‘강’인 것이다.

  그렇다면 ‘강’이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문학에서 사용되는 강은 보통 시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 ‘강’이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일종의 상징성을 지닌다. 특히나 산 자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써의 모습으로 자주 쓰인다. 예컨대 켈트 족 전설에서는 죽은 후 강을 건너 아발론이라는 섬에 갔고, 그리스 신화에서는 레테강의 물을 마시면 이승을 잊게 된다. 반면에 고대 인도경전이나 불교에서는 실제 강이 갖는 상징은 많이 사용되지는 않으나, 강의 ‘흐름’은 때때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정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써 윤회를 상징하는데, 이때 등장하는 해탈이란 윤회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특히나 헤세의 문학에 있어서 ‘강’은 더 많은 중요성을 지닌다. 먼저 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또한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모인 뒤 다시 증발한다. 이는 다시 비로 내려 순환의 고리를 완성한다. 이런 점에서 ‘강’은 우주의 순환의 원리, 혹은 윤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소설 『싯다르타』에서는 현세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결국 화자인 싯다르타가 1부에서 고타마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나와있는 것이다. 즉, 부처에게 해탈이란 윤회의 순환을 끊는 빈틈이었다면 헤세 소설의 싯다르타에게는 윤회의 다양한 삶을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헤세에게 강은 영원히 변화하는 동시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의 상징이다. 헤세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강물에서 얻은 깨달음의 의미를 시간이란 개념을 통해 다시 설명하며 강조한다.
 
 헤세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일직선상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동시성의 시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싯다르타가 강물에서 보고 들은 수천의 사람과 삶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모습이었다. 현세와 영원 사이에, 번뇌와 행복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놓인 간극은 바로 일체의 고뇌의 근원이 되는데 이는 시간에 대한 오해 때문이며 시간의 동시성을 인식한다면 번뇌에서 벗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흐르고, 멈춰있고, 증발하고, 다시 내려 결국에는 이를 반복하는 것. 강의 흐름은 윤회를 보여주는 거울의 모습이다. 투명한 강물에 비친 수많은 사람들과 옴의 노래를 통해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를 통해 헤세가 사용한 ‘강’이라는 장치가 단순히 흐르는 물이 아닌 그 이상의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흘러가는 강(江)의 진리란 모든 삶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것이 담겨있고 사라지고 돌아오는 원형의 고리. 그러나 거스를 수는 없는 진리. ‘강’이란 그런 것이다.


 헤세의 『싯다르타』는 종교적 이야기 보다는 하나의 깨달음, 혹은 인생의 진리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특히나 헤세는 동양 사상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작가로 소설에는 유럽인이자 소설가인 그가 바라본 동양철학, 사상에 대한 시선이 잘 녹아 들어 있다. 삶이 공허할 때, 우리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진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때 헤세의 『싯다르타』를 추천한다.





참고문헌

박광자, 『헤르만 헤세의 소설』, 충남대학교 출판부, 1998.
이기영, 『석가』, 불교문화연구원, 2009.
정경량, 『헤세와 신비주의』, 현용사, 1997
최윤영, 「두 싯다르타」, 『헤세연구』, 제27집, 2012.
황진, 『헤르만 헤세, 생애 작품 및 비평』, 계명대학교 출판부, 1982.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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