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상자 [문화전반]

마음의 상처, 잘 다독이고 있나요?
글 입력 2016.12.1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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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상자를 많이 갖고 있다. (…)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호들갑스러운 친구가 사주었다는 하얀 배냇저고리가 든 상자도 있다. 그 아이가 3개월 만에 자연 유산된 후 아내는 또 다른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그런 물건을 간직했다."
은희경 「아내의 상자」 中



# 나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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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상자를 모아둔다. 버리지 못할 것들이 생길 것만 같아서다. 이미 벽장 안엔 속이 가득한 상자가 여럿이다. 물건들은 본래 용도와는 상관없이 내가 가진 기억에 따라 어떤 상자에 보관될지가 결정된다. 작은 지지대가 달린 메모꽂이, 손톱만한 마트료시카가 줄줄이 꿰어진 장식물과 발신자를 달리하는 각각의 편지들은 모두 한 곳에 담긴다. 나는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인가를 확인받고 싶을 때, 그냥 필요한 물건이 있을까 싶어서, 수시로 상자는 열린다.  

 반면 자칫 열릴까 두려운 상자도 있다. '이때로 돌아간다면 무언가 바꿀 수 있을까' '나로서는 최선이었어'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가 메아리치는 곳. 오래도록 열리지 않은 이곳의 물건들은 소화되지 못하는 것들이 그렇듯, 텁텁한 냄새를 풍기며 엉겨있을 것이다. 상자의 겉면만 겨우 훑으며 생각했다. '언젠가 버리긴 해야 할텐데..' 상처를 자극하는 물건들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내가 잠든 후 여기저기서 튀어 올라 내 방을 온통 어지럽힐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안전하게' 이들을 상자에 담고 급하게 뚜껑을 덮는다.

# 「아내의 상자」

 "아내의 상자에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를 스쳐 지나간 상처들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상처가 회복된 다음에도 몸에 남아 있는 흉터로써 그 상처를 기억한다. 그녀는 흉터를 지니듯이 방 귀퉁이에 상자를 쌓아갔다."
 
 1998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에서는 ‘상자’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소설은 남편인 '나'의 목소리로 시작하고 그의 목소리로 끝이 난다. 신도시로 이사 온 '나'와 '아내'는 겉보기엔 부족할 것 없는 부부다. '나'는 말한다, 아내는 음식을 곧잘 하고, 정리를 잘하는 괜찮은 여자였다고. 잠이 '이상하리만큼' 깊었고 방에 상자들을 쌓아두었지만 별 문제가 없었다고. ‘나’는 그녀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어느 날 부턴가 그녀는 이사 온 옆집 여자와 좀 친해지는가 싶더니 그 여자에게 소개받은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 남편에게 들킨 후 아내는 감기를 심하게 앓고는 더 여위고, 깊은 잠을 자기 시작했다. 밥을 먹은 후 밥을 먹었는지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자 남편은 그녀를 ‘동의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곳'에서 지내게 한다. 그러곤 아내가 있던 집에서 벗어나려 이사준비를 한다. 그가 신도시를 벗어나며 상자가 쌓여 있던 '아내'의 방도 사라지게 된다. 

"아내가 그녀의 안락의자에 파묻혀 잠든 것을 보면 이따금 그때 생각이 났다. 뚜껑이 닫힌 상자들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 그것은 자신을 상처입힌 세상을 향해 빗장을 지르고 잠들어버린 그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녀는 다루기 힘든 기억과 세상이 준 상처를 ‘상자’ 속에 담고, 뚜껑을 덮어 둔다. 쌓아 둔 '상자'들은 그녀가 넘어서지 못한 수많은 상처를 뜻한다. 어루만져지지 못한 슬픔들이 '상자'라는 정지된 시간 속에 보관된다. 상자들은 그녀에게서 세계를 빼앗았고, 그녀와 세계를 단절시켰다. 결국 세계가 그녀의 존재를 지우게끔 만들어 버렸다. 사실 '아내'는 '깊은 잠'과 이해되지 않는 '엉뚱함'으로, 때로는 갑작스러운 '눈물'로 끊임없이 자신의 증상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채준 사람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상대였던 남편과도 소통은 불가능했다. 소설 속에서 '아내'에 관해 이기적이었던 '나'는 그녀와 어떤 유의미한 유대관계도 맺지 못한다. '아내'의 세계는, 그녀 곁의 타자들은 그렇게 가혹했고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했다.


#당신의 상자

 최근 몇 년간 출판계에서는 심리학 책들이 줄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교보문고가 작년 출판계 동향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심리학 도서들은 인문분야 내 점유율이 24.6%, 신장률은 48.5%로 상승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마음을 치유해주겠노라하는 강연들이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연을 찾았다. 지금 많은 이들이 자신의 마음에 '치유'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고 상처받아 본 적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처 그 이후다. 상처들이 자신의 마음에 빗장을 걸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치유의 시작을 어느 한 쪽의 책임으로 남겨두고 싶지는 않다. '상자' 속에서 상처를 꺼내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고, 타인의 애정어린 시선에서부터 시작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치유는 상처를 가리는 과정이 아니란 사실이다. 아무리 은폐하더라도 상처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때문이다. 삶의 과정에서 장애물이 되어 나타날지도 모르며 누릴 수 있는 세계의 반경을 순식간에 좁혀 버릴 지도 모른다. 치유는 오히려 드러내는 과정이며, 사랑같은 어떤 뜨거움으로 다독이는 과정이 아닐까. 타자에게 보이는 나의 애정에서, 타자로부터 받는 애정에서 치유의 계기는 마련된다. 

 자신조차도 모르는 곳, 그 어딘가에 은폐시키고 싶은 상처가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뚜껑을 덮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상처를 향해 방향키를 돌려잡자고. 불안하고 두렵겠지만 서로 다독이며 치유의 과정을 시작하자고 말이다.





대표 이미지 출처 "Designed by Freepik / Freepik"


[이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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