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달콤살벌한 잔혹동화, '디저트 월드' [도서]

작가와 토끼 남자, L의 이상한 나라로
글 입력 2016.11.06 06:4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디저트월드.jpg


  나는 에세이를 읽고 있었다. 가벼운 삶의 양상과 수필이 아닌, 진중하고 무거운 에세이. 문득 집중이 되지 않아 가벼운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냥 디자인과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디저트 월드’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었다. 실제로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 예쁘게도 생겼다. 일러스트도 심플하면서 감각적이다. 게다가 디저트란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얼마나 달디 단 단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의 첫 인상이 무거울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실상 이 책을 그러한 가벼운 마음으로 들었다가는 책을 읽는 내내 황당함을 감출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경고하고 싶다.

  이 책은 ‘몽블랑, 당근 케이크, 마카롱, 자허토르테, 오렌지 쿠키, 레드 벨벳 컵케이크, 라즈베리타르트’ 등 달콤한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토끼 남자’의 ‘디저트 월드 탐방기’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당최 감을 잡을 수 없는 단어들이 출현하지 않는가? 나는 이 책이 그런 책이라고 명료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토끼 남자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토끼 남자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 우리가 사는 세계인 디저트 월드로, L을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와 디저트를 즐기러 내려온다. L은 매년 할로윈에 그를 만나, 이야기와 디저트가 토끼 남자의 마음에 들었다면 할로윈이 아닌 나머지 364일을 살아갈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어휘는 ‘접는다’는 것이다. 접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L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해나가야만 하는데, 이러한 고민이 무색하게끔 책은 중반에서 이러한 고민에 대한 L의 해답을 내놓기도 한다.
< “내가 삶을 접어줄까?” 토끼남자는 말했다. “접는다는 것이 뭡니까?”라고 물은 순간, 그는 접는다는 표현을 이해했다. 그의 삶은 펼쳐져 있고 끝나간다. 펼쳐져 있으므로 끝이 있다. 끝이 오면 끝이다. 하지만 접는 순간 끝이 사라진다. >

  ‘접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펼쳐져있는 시간의 끝을 겹침으로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포개져 뒤죽박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근거로 L은 토끼 남자가 이야기와 디저트가 마음에 들어 그의 삶을 접어줄 때마다 똑같은 시간 안에 갇혀 1년을 살아가게 된다. 그는 새로운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 포개져 있는 시간을 계속해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좀비와 같은 몸 상태로 살게 된다. 그는 토끼 남자를 만나는 할로윈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쇠하고, 피를 토하며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기도 한다.
< 그도 한때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그는 할로윈과 할로윈이 아닌 나머지 364일에 갇혀서 살아갈 뿐이다. >
  하지만 책 초반에서의 L은 토끼 남자에 의해 접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뒤죽박죽으로 얽혀있는 시간 사이에 갇혀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서울 신문에 실린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디저트 월드가 “예고 없이 닥친 불행 앞에 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L이 처한 상황은 이러한 이야기의 한 모습이다.

  또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계속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오른다. L은 어느 날부터 보이기 시작한 검은 구멍에서 토끼 남자를 처음 만난다. 이 검은 구멍은 토끼 남자의 높은 곳과 디저트 월드 사이의 토끼 구멍일 것이다. 토끼 남자와 토끼 구멍부터 시작해서 트럼프 카드와 바다거북에 대한 이야기, 고양이, 파란 드레스의 소녀, 하얀 여왕 등등,..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비단 소재 뿐 만이 아니다. 토끼 남자의 세계인 ‘높은 곳’은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이다. 높은 곳에서 오는 존재들도 모두 눈에 띄는, 디저트 월드의 입장에서 볼 때 이상함 그 자체이다. (이는 L이 토끼 남자를 할로윈 날에 만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독자는 그 이상한 나라에 가 볼 수 없고, 토끼 남자 혹은 L의 묘사에 따라 그 세계를 상상할 수밖에 없는데, 책에서의 제한된 묘사 덕분에 오히려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존재의 세계이지만 마치 나의 공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가 있다. 이 책이 만약 영화로 나온다면 내용은 기승전결의 구조를 찾기 힘들 만큼 정말 심심하지만, 소소한 연출이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상상력을 자극해서 책의 내용을 머릿속에 그리게 되니까.
< “강판이라…….” 토끼남자가 말했다. 토끼남자의 생각이 강력한 모양이었다. 카운터 직원이 내뿜은 연기가 잠시 강판 모양으로 변했다가 흩어졌다. 토끼남자의 생각이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이상하게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장르와 달리 나는 소설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소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는 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어서 많이 읽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을 퍽 오랜만에 읽게 되었다. 책에 대한 감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나는 썩 괜찮은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디저트 월드를 읽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 책의 의미가 뭐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뭐지?’ 하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을 돌아보았을 때 이 책은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표현이 재미있어서 읽게 되고, 몇 번을 그렇게 책의 앞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읽고 나서야 ‘아~’ 하면서 조금 씩 조금 씩 이해를 쌓게 되는 책이다. 끊임없는 생각을 하게하고, 또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야 이 책을 읽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표현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디저트 월드는 표현이 참 참신하고 예쁘다.
< 토끼남자는 접힌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산에 올라갔다고 했다. 산은 땅이 접힌 것이기 때문이다. 토끼남자는 케이크의 접혀 있는 부분을 좋아했다. 단맛과 신맛 혹은 부드러운 버터의 향이 접혀 있는 곳, 혹은 밀가루와 크림, 초콜릿의 식감이 접히는 곳이 혀가 접히는 부분에 닿을 때가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프스는 너무 크게 접혀 있기 때문에 입안에 넣을 수도 없고 맛을 볼 수도 없다. >

  하지만 책의 내용은 결코 예쁜 내용만이 아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독자에게 마냥 가볍지 않은 이야기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 너무 무섭지 않을 정도로만 으스스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일러스트부터 L이 토끼 남자에게 이야기해주는 디저트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아기자기하지만, 함께 들려주는 도시괴담은 참혹하고 으스스하다. 나는 이 책을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을 달콤 살벌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즐거움과 조금의 푸르스름한 기묘함을 선물하는 디저트 월드로 초대한다.
 
 
[정다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