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야마 부시코, 현실은 신화를 만나 삶이 된다

글 입력 2016.02.2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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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야마 부시코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작품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원시적인 일본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70세가 넘으면 나라야마 산신령에게 가야 한다’는 고려장 전설을 비롯하여 가난 속에 살아남기 위한 마을의 여러 가혹한 규율 안에서 살아가는 일가의 모습을 그려냈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예술에는 작가의 의도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예술은 시선입니다. 짐짓 객관적인 척 하는 사진마저도 사실 구도, 소품, 분장 등을 통해 관객이 작가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유도합니다. 영화는 어떤 장면에서 시청자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를 여러 방식으로 알려주지요. 이 시선이야 말로 기록이 예술이 되는 지점이고, 창작자의 주관이 발현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시선이 얼마나 노골적이냐는 작품마다 다르게 마련입니다. 많은 예능들은 자막이나 효과음 등을 통해 시청자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매우 노골적으로 지시하지요. 지젝의 말마따나 심지어는 관객을 대신해 웃어주기도 합니다. 반면 나라야마 부시코는 시선이 잘 드러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나라야마 부시코가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은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습니다. 대부분의 씬이 롱테이크로 촬영된 데다 클로즈업과 배경음악은 거의 쓰이지 않았습니다. 배우들의 감정표현도 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들을 썩은 논에 버리고 딸을 소금 한 줌에 팔면서 등장인물들은 울지도, 그다지 우울해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감정이 소거된 것은 아닙니다. 극 후반, 주인공 격인 다츠헤이(오가타 켄 분)는 어머니를 백골더미 앞에 버리고 오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이 여과 없이 스크린에 비춰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감정적 반응을 없애서 건조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사실 위의 비극들에 배우들이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도 감정을 빼기 위한 시도보다는 그 비극의 일상성을 강조하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라야마 부시코를 보면 어떤 마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읊조리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감독의 의도도 잘 보이지 않아서 여러 지시들과 감정신호들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간혹 불친절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특정 감정을 부추기는 장치들이 없으니 누구에, 어떤 감정에 이입해야 하는지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합니다. 게다가 영화에서 일어나는 비극들은 우리가 상상하거나 이입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감자를 훔쳤다가 생매장 당하는 가족, 악취 때문에 개와만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남자, 70세가 되면 산에 가서 굶어 죽어야 하는 노인을 보면서 관객은 철저한 타자로 남겨집니다. 도저히 이입할 수도, 이입하고 싶지도 않은 농도의 고통 앞에서 무거운 한숨을 뱉을 뿐이지요.

이러한 이입의 부재는 우리에게 ‘한 발 떨어져 보기’의 기회를 열어줍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입한 대상의 시선에서 나 자신의 삶을 보게 됩니다. 그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쁨과 고통을 보지요. 그러나 나라야마에서 우리는 이입할 대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의 삶이 아닌 마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무가 바라본 숲의 모습이 아니라, 숲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의 시선에서 바라본 숲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로써 나라야마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화와 그 신화로 지탱되는 사회의 이야기로 탈바꿈합니다. 

영화의 마을은 ‘나라야마’라는 산신령의 신화로 유지되는 마을입니다. 얼마 안 되는 식량으로 마을이 연명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비인간적인 일들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일을 잘 하지 못하는 70세 이상의 노인들은 산에 버려져야 하고, 식량을 훔치는 도둑들은 가족채로 생매장하는 가혹한 규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필요악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바로 산신령 나라야마입니다. 도둑들은 ‘나라야마의 뜻대로’ 생매장당하며, 노인들은 나라야마의 산 정상에 가면 산신령이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믿음 하에 아들의 등에 업혀 산으로 향합니다. 

사실 그들도 모든 것이 식량 때문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제 어머니를 굶겨 죽인다는 사실을 어찌 짊어지고 살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이가 든 어머니는 흉작이 든 해, 자신의 이빨을 절구에 부수면서 아들에게 천국에 가고 싶다고 조릅니다. 그리고 눈 오는 날 해골이 쌓인 산 정상에 어머니를 두고 내려온 아들은 손자가 ‘할머니는 운이 좋아. 눈이 오는 날에 나라야마에 갔다네.’라고 노래 부르는 것을 가만히 듣습니다. 나라야마는 어찌 보면 비참한 현실을 은폐하고 책임회피를 가능하게 해 주는 탈출구입니다. 비겁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세상에는 회피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책임들이 있습니다. 나라야마는, 그 마을 사람들이 살아남는 방법인 셈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고려장이 아니라 나랴아마 부시코, 즉 ‘나라야마의 노래’입니다. 

이처럼 신화로 지탱되는 마을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사회는 여러 가지의 신화로 점칠되어 있습니다. 모성애의 신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화, 법이 진리를 품고 있다는 신화,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신화 등이 있지요. 이들이 신화인 이유는 종교적이거나 허구여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인 가치로 취급되어 불합리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신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러한 신화들이 오롯이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젝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행동하면서 환영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그것을 행한다”고 지적한 바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가치들을 믿으면서, 그 신화들이 만드는 은폐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삶의 비참함을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기에, 우리는 약하니까요. 

이처럼 나라야마는 시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나’의 삶이 아닌 우리 사회를 굽어보게끔 합니다.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우리의 약함과 현실의 외면을 따뜻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제목을 나라야마 부시코라고 붙인 것은 어쩌면 이러한 신화와 환영에 기대어 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위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는 눈이 오는 날 나라야마에 갔으니, 운이 좋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라는. 
[이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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