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검은 빛의 아득한 깊이 [전통예술]

글 입력 2016.02.2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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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를 스케치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여러 번 들르게 되었는데 그 때 흑유자기에 대해 알게되었다. 
검은 빛이 나는 이 도자기에 대해서는 사실 이전에는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도자기 하면 생각하게 되는 청자나, 백자, 혹은 분청자기와 V&A박물관 도자실에서 봤던 어지러운 빛깔의 채색자기에 관심을 먼저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스쳐지나가는 유물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색이 검은 빛이라 크게 눈길을 끌지 못했던 것이겠거니...

천천히 둘러보며 보게 되었던 흑유자기는 그 깊이감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복과 자연염색을 배웠던 소격동 어느 골목 깊은 곳의 개량한옥에서 
검은 빛의 하늘색 점이 꽃을 피운 듯 한 다완을 보았었다. 
아 이런 도자기를 만드는 기법이 현대에 많이 생겼구나 할 만큼 
도자기의 종류에 대해서 정말 단순히, 거의 기본적인 지식만 알고 있었던 때 였다. 

그 때의 그 다완과, 다기 세트의 검은 빛에서 시리고 아득한 푸른 빛을 보았고
마치 저 깊은 심해의 바다는 이런 빛이겠구나, 심해의 동물들의 세상은 이런 색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았던 검은 빛의 도자기들은 
울퉁불퉁한 그 다완 같은 의도된 거침이 미의 기준이 아니였던 시기의 매끈한 도자기들이 가지는 
갈색 빛의 검은색과, 노란 빛, 파란 빛이 함께 있는 검은 색, 혹은 붉은 빛을 띄는 검은색
색이 꽉 들어차있지만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었다. 

꼭 비 맞은 나무처럼, 
하루 물을 먹지 못해 시들어 버석버석 말라가는 파아란 수국처럼, 
캄캄한 시골길에 켜져 있는 가로등 처럼, 
혹은 태국 어느 마을에서 봤던 어둠 속의 반딧불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의 털의 색부터 시작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많은 색들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 색이자. 
지금은 모던함의 대명사, 한국인이 가장 많이 입는 색
그렇지만 뭐랄까 지금 내가 흔히 보는 검은색은 종이보다 얇은 검은색 같다. 단순한 겉껍질 같은 검은색. 
컴퓨터나 핸드폰 화면을 통해 보는 화면 속의 글씨이고 단순한 #000000라는 기호로 표기될 수 있는 검은색이다. 
그렇지만 그 옛날 사용했던 검은 빛은 안에 무언가가 끊임 없이 있어 그 가치가 합쳐짐으로써 발현되는 검은색. 
단순히 도자기에 뿐 아니라 늘 사용하던 먹부터 다른 많은 것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가려진 무언가가 있다.
화학적인 검은 빛이 아닌, 자연으로부터 온 그 무언가로부터 발현된 색은 단순한 이유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지금은 기술이 발전했다고 하는 시대가 아닌가. 
기술이 발전했으면 색의 다양함을 낼 수 있는 그 범위도 넓어졌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흰 빛의 혹은 탁한 베이지 색의 그릇에 검은 색을 입힌 이유가 무엇인지도,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이전 시대 사람들이 검은색을 어찌 생각했는지도 궁금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철학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말이다. 
아마 그 것은 이 검은 빛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검은 빛이라는 이 빛 속에 겹겹이 쌓여있는 가치들이 내가 보고 있는 이 유물들이 지켜내 온 시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혹은 그 것을 만들었던 사람으로부터, 당시 사람들의 마음가짐, 혹은 사용했던 사람들의 그릇으로부터 나오는 깊이감 일까. 
단순히 내가 그 시대의 철학이나 사상을 배우려고 한다면 그러한 가치의 아우라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일까. 

지금 현대인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이 가지는 가치와, 물건에 대한 관념과 
그 시대의 관념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아우라 라는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생각할 여유 없이 따라가기 급급한 빠른 속도의 시대, 
소비의 규모가 큰 시대라고 하지만 그것 보다는 현대는 소모품의 시대라고도 생각될 수 있을 만큼 
물건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까지 모든 것들 이 일회적으로 사용되고 버려지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단편적이고,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마치 삶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맴맴돌다가 수박 과육을 맛보지 못하고, 혹은 맛보려는 순간에 끝에 다다르는 느낌이다. 옷도 싸게 사서 입고 버리면 되지 라는 생각, 어느 곳에 가도 나와 같은 구조의 공간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만연한 만큼 그 내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 또한 단편적, 일회적이고 그에 따라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치 매트릭스 속의 사회처럼 내가 나의 삶의 살아가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나를 조종해 이러한 삶을 살도록 정해놓은 듯한 깨림칙한 느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요즈음의 생각이다


요즘 부쩍 그 옛날 사람들이 부러워지곤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가치와 생활이 뿜어내지 못하는 그 중후한 아우라를, 
그릇의 깊이를 가지고 싶어 부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저들의 뒤를 이은 세대임이 맞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껍데기인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검은빛의 차이처럼 같은 공간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지금의 나와의 거리감, 차이로부터 단순한 이질감이 아닌 괴리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유물이라고 보는 이러한 깊이의 아우라는 이를 사용하는 이들과 그들의 가치를 담을 만큼 시대의 그릇이 풍만했다고, 우리의 사회도 다시 풍만해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다시금 그런 가치의 층들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박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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