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극 '에쿠우스' 욕망이 거세된 근대문명을 뒤집다 [공연예술]

글 입력 2015.11.22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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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아이를 유령으로 만들어 버렸어.”
  “의사는 정열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창조할 수는 없다.”
  “어둠 속을 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정상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원시의 세계, 고통과 동일 선상에 놓이는 정열은 또 무엇인가.
 

에쿠스.jpg
 
 
  연극 <에쿠우스>에 대해 먼저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현존하는 최고의 영국의 극작가 피터 쉐퍼의 대표작으로 영국에서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시대가 지나도 변치 않는 신, 인간, 섹스에 대한 고민과 인간의 잠재된 욕망에 대해 치밀한 구성으로 초연 이후 4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관객의 뜨거운 찬사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희곡을 단 한 번 읽고 나서 이렇게까지 연극으로 보고 싶어했던 적은 없었다. 대개 텍스트와 공연, 소설과 영화, 희곡과 연극은 항상 어느 한 쪽이 더 좋기 마련이었는데, <에쿠우스>는 같으면서 참 달라서 매력적이다. 작년 여름, 연극에 관심 있는 대학 동기들과 결성한 희곡 스터디에서 <에쿠우스>를 처음 읽었을 때의 그 감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글로만 읽어도 느껴지는 이 장황하고 거대한 내용이 연극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지 한창 상상하곤 했다. 특히 작품 속 에쿠우스, 말이라는 동물을 무대에서는 대체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다. 보통 연극들처럼 말의 클리셰를 따서 어느 정도만 살짝 보여주고 말겠지 라는 생각은 과연 오산이었다. <에쿠우스>의 말은 콧김을 내뿜고 말발굽이 달린 발을 마구 굴리는 한 마리의 살아있는 말 그 자체였다. ‘그냥’ 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공연 관람 후 지인들이 어땠냐고 물을 때마다 ‘그냥’ 말 이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압도되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파격적인 소재만큼이나 던져주는 메시지도 굉장히 심오했다. 순수하고 원시적인 열정을 스스로 파괴하는 알런과 알런을 치료하려 했으나 그 정열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자괴감에 빠지고, 그 아이의 특별함을 파괴한다는 죄책감에 도리어 자신에게 재갈을 물리고 만 다이사트를 통해 억압된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알런의 신들린 연기와 작품을 이끌어가는 다이사트도 좋았지만, 너제트라는 말의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인간의 육체를 이용한 동작들이 이렇게나 역동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육체의 언어란 새삼 대단하고 느꼈다. 에쿠우스의 현신인듯 말이라는 동물의 느낌을 뛰어넘어 마치 신화 속에 나올 법한 신비한 존재로까지 느껴졌으니 말이다.   

  어릴 적부터 그림이나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항상 다른 동물에 비해 말에게는 왠지 모를 경이로움과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가져왔었다. 초등학교 때 <말의 미소>라는 동화책을 읽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루브르 미술관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이라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발을 떼지 못하고 명화퍼즐까지 샀던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희곡을 읽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의 형상과 너무나도 닮았기에, 그리고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기에 나는 이 연극을 한 번 더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았던 공연과는 전부 다른 캐스팅으로 다시 보고 나니, 주인공 다이사트와 알런의 감정선에 대해 잘 이해할 것도 같고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도 같다. 내가 감히 함부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의 의도를 너무나 상세하게 알려주는 과도한 친절이 약간 거슬리기도 했지만, 오히려 시각적으로 충격을 받았을 관객들을 조금은 다독여준 것 같다. 중간중간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요소가 많았는데, 사이드 구역이라 제대로 못 본 것이 굉장히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도 조재현, 류덕환 등 새로운 캐스팅으로 12월 11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다시 40주년 기념 공연을 올린다고 한다. 이번에는 꼭 정 중앙에 앉아 또 다른 캐스팅으로 새로운 느낌을 맞이하고 싶다. 마흔의 나이에도 알런 역으로 열연했던 조재현은 지난 2009년에 이어 다시 한번 다이사트로 돌아온다. 아버지께서는 대학생이셨을 때 배우 송승환이 알런 역인 <에쿠우스>를 보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로 서른 몇 해가 흐른 지금, 그때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 내가 서영주(여담이지만, 서영주 배우는 극 중 알런의 나이와 비슷한 10대 배우로 가장 알런이라는 소년의 심리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와 남윤호 배우의 알런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일곱 마리 말들의 눈을 찔렀다는 참혹한 결과로부터 시작해서 알런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던져지는 질문들, 알런을 통해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는 나의 인생과 현재 나의 모습. 아직은 미묘한 경계에서 알런과 다이사트 박사의 연기를 보고 있는 나는, 아마도 곧 다이사트 박사가 옳다고 믿고 그 뒤를 쫓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는 그게 정상이고,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일 테니까. 하지만 멀리서 들리는 발굽소리를 무시하고, 등돌린 채 욕망을 감추고 점잖은 척 거죽을 뒤집어 쓴 그 모습을, 정말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다.


에쿠스2.jpg
 

  알런이라는 소년에게 있어 말은 무엇이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희곡에 관심이 많았던 나의 관점에서는 다소 친절한 극이었지만 결코 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말은 많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채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 진다. 신, 냉혹한 현실성, 숙명의 굴레, 원초적인 성의 본능… 하지만 나는 알런에게 있어 말은 자유에 대한 갈망, 혹은 자유 의지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알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성격으로 부딪히는 것 같지만 표현 방식이 다를 뿐 결국 어린 알런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강압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굴레 속에서 알런은 늘 자신을 억압한 채 살아왔어야만 했다. 오직 마구간에 갈 때만 빼고 말이다. 처음에 알런이 다이사트에게 취조 당했을 때, 말을 탄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이사트가 이 점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듯이 나 또한 점이 궁금했었다. 아마 알런은 제 손으로 얻어낸 하나 뿐인 자유를 또 다시 빼앗길까 하는 걱정에 제 나름의 방어를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몰래 숨어서 만끽한 반 쪽짜리 자유였기 때문일까, 끝내 알런은 완전한 자유를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실패가 아닌 좀 더 단단한 것으로 만들 기회라고 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알런을 제대로 이해하는 다이사트의 존재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 역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으로,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니 부디 다이사트가 알런이 그 자신일 수 있는 개성을 빼앗았다고 자책하지 않길 바란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한강의 <몽고반점>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처제의 엉덩이에 남아있는 몽고반점을 보며 예술적 영감과 성욕을 동시에 떠올리는 비디오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단편소설이다. 한강 소설의 키워드 중 하나인 '동물적 세계에서 꿈꾸는 순정한 식물성(性)'이 모티프를 이루는 이 작품은 탐미와 관능의 세계를 고도의 미적 감각으로 정치(精緻)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순한 나체예찬을 넘어, 척박한 현실과 환상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고뇌하는 예술가의 고통과 파멸을 통해 아름다움과 순수함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하는 내용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원초적 절대미는 제도권 사회에서 윤리적인 제한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우리)는 원초적 절대미 실현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야기로 에쿠우스를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과 충격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러한 주제들을 좋아하는 건, 아마도 내가 감히 그에 미치지 못하는 미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외쳐본다. 에쿠우스 에쿠-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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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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