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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믿을 수 없는 절망, 기약할 수 없는 희망 [영화]

나홍진 <곡성>과 <호프>

by 차승환 에디터
2026.07.24 17:44

 

 

10년 만에 개봉한 차기작이었으므로 그 긴 공백만큼 부풀었던 기대감은 어쩔 수 없는 일. 찝찝하고 의문스러우며 그만큼 훌륭했던 영화 <곡성> 이후를 기다렸던 관객들이 같은 감독의 신작 <호프>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여전히 찝찝함과 의문이다. 극장을 나선 후 여운처럼 남아있는 동일한 감정, 그러나 그 뒤에 붙는 관객의 평가는 사뭇 갈리는데, 이는 두 영화를 두고 감독이 의도했을(혹은 미처 하지 않았을) 흐릿한 반복과 명백한 차이 때문일 것.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2016)과 <호프>(2026)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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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가 인지가 될 때: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 알 수도 있는 것


 

시종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작은 시골 마을. 영화 <곡성>과 <호프>는 비슷한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시대적 차이는 다소 존재하지만 나홍진의 두 영화가 고즈넉한 농어촌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조용한 천국 안에 소란한 지옥문을 열 때 드러날 인간의 모습을 정직하게 살피기 위함일 테다. 적어도 지난 10년간의 나홍진은 복잡한 도시의 삶에서 이미 서로에게 오염된 사람들의 인간성에는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영화는 시작부터 불길한 분위기를 배음처럼 깔면서 마을을 마냥 평화롭고 정겨운 공간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곳은 그저 주민들이 끈끈하게 결속되었으나 이익과 계산으로 얽혀있지는 않은 순수한 내부적 공간일 뿐이데, 나홍진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유독 단단히 폐쇄된 조용한 천국 안에 바깥과 연결된 지옥의 문을 서슴없이 연다.


<곡성>의 배경 ‘곡성’과 <호프>의 배경 ‘호포’ 안에 지옥문이 열리자 등장하는 것은 이질적인 외부의 존재다. 곡성에서는 외지인(후에 악마로 묘사되는), 호포에서는 외계인으로 표현되는 분명한 외부의 존재들이 평화로운 내부를 침범했을 때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이 두 영화를 이루는 골자다. 단단한 내부에 낯선, 혹은 위험한 외부자가 출현할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불길함이 있다. 집단을 이루며 살아온 인간의 근원에 새겨진 은밀한 공포를 정확히 잡아내 탁월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곡성>에서 충분히 입증했으니 우리가 나홍진의 신작 <호프>에서 기대했던 것 역시 그러한 역량이었을 텐데, 이번에는 절반의 성공―러닝타임의 절반가량―만 거둔 것처럼 보인다.


미지의 외부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내는 세 가지 조건은 이것이다. 외부자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아는 것), 그 외부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며(모르는 것), 닥쳐올 역경을 극복하고 나면 끝내 알게 될 거라는 기대감. 예컨대 <곡성>에서 마을 사람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외지인(쿠니무라 준)과 무명(천우희)의 정체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미지의 두 존재에 대한 의심은 외부자를 물리쳐 딸 효진(김환희)을 구하기 위한 종구(곽도원)의 분투가 끝난 영화의 결말에서조차 무수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역경을 통해 아는 것에 모르는 것의 진실을 더해가는 것이 이와 같은 영화가 나아가는 정석이라면, 나홍진은 인지에 대한 희망마저 비틀고 미지를 끝내 미지로 남겨둠으로써 <곡성>을 미완의 수작으로 만들었던 것.


반면 <호프>에서 호포를 파괴하는 외부자의 정체는 영화의 중반부 이전에 명백히 드러난다. 숨겨진 진실을 밝혀가는 미스터리보다는 인간이 외계인에 맞서 싸우는 액션에 가까운 영화의 장르적 특성상 필연적 선택이겠지만, 문제는 <호프> 속 외계인의 존재가 미지에 대한 지속적인 흥미와 불안을 크게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까지 요동치던 긴장감은 외계인의 모습이 드러난 영화의 중반 이후부터 너무 빠르게 힘을 잃는다. 외계인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외부의 적으로 단순하게 규정되고, 호포의 인물들은 시종일관 무력하고 처절한 사투를 벌이다가 영화는 다소 허무하게 끝난다.


믈론 외계인의 언어가 자막을 통해 해석되는 영화의 후반부에서야 외부자의 미지가 얼핏 윤곽을 드러낸다. 그러나 <곡성>처럼 영화 전체에서 천천히 쌓아올린 근거 없이 극도로 제한된 몇 마디의 정보량만으로는 흐릿한 추측만이 있을 뿐이고, <호프>를 둘러싼 미지의 진실 자체는 우리에게 당장 흥미롭게 다가오지는 못한다. 우리가 나홍진의 영화에서 은밀히 기대했던 요소는, 진실의 추적이 아닌 외부와의 사투에만 크게 힘쓴 나머지, 오히려 부족해졌던 것. 애초에 삼부작을 염두에 두고 아직 완전한 진실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일 수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영화적 흥미나 긴장감을 크게 일으키지 못한 시도였고, 그 자체가 한 편의 영화로서 응당 있어야 할 결말만이 빠지게 된 셈이다. 말하자면 <호프>에서 미지는 너무 빨리 인지되었거나, 혹은 애초에 흥미로운 미지가 되는 데 실패했다.

 

 

 

뒤로 걷거나, 앞으로 달리거나


 

영화 내에서 관객에게 주어지는 정보의 양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떤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혹은 어떤 정보를 기어코 내어주지 않는가에 따라서 영화는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 것. <곡성>과 <호프>에서 외부의 존재에 대한 정보량은 극도로 적다. 수상한 외부인에 대한 정보는 주로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내부의 소문에 의해서 전달되거나, 일시적 관찰에 의해서 제한적으로 확정될 뿐이다. 그러나 동일하게 제한된 정보의 양을 관객에게 쥐어준 뒤 두 영화가 나아가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곡성>은 천천히 뒷걸음질치고, <호프>는 맹렬하게 앞으로 달려간다.


내부의 제한된 정보는 막연한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두려움에 휩싸인 내부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다. 믿음직한 누군가를 찾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내부가 더욱 단단히 결속하여 맞서거나. <곡성>이 먼저 선택하는 방식은 전자다. 종구 일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당 일광(황정민)을 찾는다. 종구의 집 마당에서 일광이 벌인 굿판만큼이나 강렬했던 것은 일광을 향한 내부, 혹은 관객의 희망적 시선이다. 그러나 종구의 의심과 혼란에 의해 굿판을 멈춰야 했을 때 길 잃은 공포는 분노가 되어 내부를 결속시키고, 끝내 희망 없는 폭력의 방식으로 변질되고 만다.


<호프>에서 외계인에 대한 정보 역시 제한적이다. 끔찍하게 죽어간 짐승의 사체에서 시작된 수상한 흔적은 근거 없는 소문을 거친 후 마침내 눈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외계인의 존재가 완전히 드러난 이후 펼쳐지는 압도적인 액션 시퀀스는 외계인의 진실을 세세히 물어볼 기회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내내 관객을 몰아친다. 범석(황정민)은 두 다리로, 성기(조인성)는 말을 타고, 성애(정호연)는 경찰차를 몰고 끝없이 달려나간다. 해술(임현식)이나 양태(음문석)처럼 무언가 진실에 가까이 있는(혹은 알고 있는 듯한) 인물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했으나, 멈춰 서서 그들을 돌아보기에는 쫓아오는 외계인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강했으니, <호프>는 무작정 앞을 향하여 소리치며 내달릴 뿐이다.


모든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찾아오는 것은 외부에서 다가오는 공포보다 더욱 짙은 절망이다. <곡성>은 제한된 정보에 희망적 시선을 투영하게 만든 뒤, 그 희망이 절망이었음을 깨닫고 나서야 뒤돌아 진실을 곱씹게 만드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뒤늦게 되돌아간 길에 남아있는 것은 피 칠갑된 비극의 흔적뿐이고, 진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한편 <호프>에서 범석 일행이 힘겨운 사투 끝에 마주하는 것 또한 재앙과 같은 결말인데, 그곳까지 가닿는 길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으니 진실은 여전히 중요하지 않다. (‘지금 상황에 그게 중요해?’) 다만 살 궁리를 찾아서, 이제는 천천히,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달려간다.

 

 

 

뭣이 중헌디


 

당연한 인정이다. <곡성>과 <호프>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한 영화라는 것. 같은 감독에게 같은 기대를 품을 수는 있겠지만,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를 유사한 관점에 따라서만 평가하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그어놓는 데서 시작했으나 두 영화는 엄연히 다르다. <곡성>은 믿음과 의심이라는 상호배반적 감정을 한 화면에 공존시키면서 진실을 향해 발을 헛디뎌가는 영화다. 진실에 다가가는 인간의 확실한 도구는 분명 이성일 텐데, <곡성>은 이성에 대비되는 특유의 종교적 색채와 그것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통하여 진실 추적 과정에서의 영화적 변주를 훌륭하게 해낸다. 반면 <호프>는 하나의 장면에 하나의 목표만을 명징하게 보여주면서 진실 따위를 뿌리치는 영화다. 생존, 외부자의 침략에 맞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처절한 분투와 질주만을 목격하면서 다른 요소들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은 영화인 것.


‘뭣이 중헌디?’ 두 영화는 같은 질문에 서로 다르게 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곡성>은 살기 위해 진실이 중요했고, <호프>는 살기 위해 진실이 필요 없었다는 것. <곡성>은 믿을 수 없는 절망 앞에서 통곡했고, <호프>는 기약할 수 없는 희망 앞에서 소리쳤다. 통곡과 호통, 그 차이만큼 두 영화는 다르다. 외부자의 관점일 때 <호프>가 그들의 간절함, 추락해버린 내부를 잃고 표류하던 그들의 희망hope을 말하는 것일지는 우리는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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