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꿈을 꾸던 시간
우리는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가족이었다. 주말 저녁이면 거실 불을 조금 어둡게 하고 TV 앞에 둘러앉았다. 구형 브라운관 TV로, 내 기억으로는 달에 두 번 정도는 함께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는 한정적이었기에 매번 선택지는 같았다. 인도 영화 특유의 절절한 음악, 발리우드 영화만의 갑자기 노래하고 춤추는 배우들을 보며 다섯 명은 매번 같은 순간에 웃음을 터트렸고 같은 순간에 눈물을 글썽였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더라도 매번 똑같이 즐거웠다. 아니, 볼 때마다 더 즐거웠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마다 “역시 이 영화지” 하고 공감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였던가?
영화는 두 시간이었지만 현실은 훨씬 길었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 사회의 문법을 수행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부딪혔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오래 방황했으며, 결국 아주 많은 비용을 내고서야 내가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때때로 그 영화를 보며 행복했던 기억을 아직도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발견하고 만다.
영화의 이름은 “세 얼간이”였다. “세 얼간이”는 대학 시절 절친했던 세 친구와, 졸업 후 홀연히 사라진 란초를 찾아 나서는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세 사람이 명문 공과대학에서 함께 생활하며 겪은 사건들과 각자의 가족, 진로, 경쟁 속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파르한이 결국 아버지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던 장면을 볼 때마다 집은 조용해졌다. 성취만을 요구받다 조이가 끝내 스스로 삶을 놓아버렸을 때는 함께 간담이 서늘해졌다. 라주가 압박 끝에 건물 아래로 몸을 던질 때면 이미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숨을 죽였다. 심장 위에 손을 얹고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외던 란초의 단단한 얼굴을 보며, 우리도 그 마법의 주문을 함께 믿을 수 있었다.

물론 “세 얼간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거운 장면들만은 아니다. 배우들이 예고도 없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발리우드 특유의 유쾌함, 몇 번을 다시 봐도 웃음을 참지 못했던 코미디, 사랑과 화해의 순간들까지.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틀었다.
우리의 심장 위에도, All is Well
나는 종종 “세 얼간이”를 떠올린다. 얼간이란 사회가 말하는 실패자가 아니라, 사회의 문법보다 자신의 삶을 믿을 수 있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영화 속 세 친구는 서로가 있었기에 얼간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웃던 어린 나는 그저 재미있는 영화라고만 생각했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All is Well”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현실을 함께 견디겠다는 약속에 더 가까웠다는 것을. 그리고 함께 얼간이가 될 수 있었기에 그 약속은 언제까지나 유효했다는 것을.
우리 가족은 왜 “세 얼간이”를 사랑했을까? 영화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 가장 나다워 질 수 있는 일을 쫓을 때 결국 진정한 성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더 깊이 기억하는 것은 그 말을 가족 모두가 믿을 수 있던 두 시간이었다.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이 되는 삶을 함께 꿈꿀 수 있었던 바로 그 두 시간. 영화가 끝나면 모두는 각자 해야만 하는 일들을 언제까지 해내야 하는지 알수 없는 채로 지내기 바빴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 딸은 모두 어른이 되었고, 가족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다. 모일 시간은 줄어들었으며, 함께 영화를, 그것도 세 얼간이를 볼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며 행복했던 기억은 여전히 나의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는 “세 얼간이”를 다시 보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도, 흥미를 잃어서도 아니다. 그 영화를 다시 보는 순간, 내가 기억하는 가족의 웃음까지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보게 될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다시 보고 싶은 것은 영화가 아니라, 서로에게 “알 이즈 웰” 이라고 말해주던 사람들과 함께하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함께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두 시간은 내 안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세상의 기준을 벗어나 잠시라도 함께 얼간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 두려움이 사라질 거라고 말하는 대신, 함께 두려움을 견뎌 주는 사람. 뒤늦게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은 이미 내게 그런 사람들이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의무를 모두 잊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던 사람들. 그때는 그것이 영화가 주는 행복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 행복은 함께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두 시간이었지만 현실은 훨씬 길었다.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글을 쓰며 오랜만에 들은 세 얼간이의 OST 'All is Well'은 내가 틀렸다고 말해 주었다. 현실은 훨씬 길었지만, 함께 꿈을 꾸는 두 시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서로를 향해 마법의 주문을 욀 수 있는 용기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