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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악의 불확실성
선과 악은 정의가 어떻건 간에 모두 ‘보통은 아니다’라는 맥락에서 쓰인다. 그중 악은 기존 권력이 신흥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기준이 되어 ‘보통이 아닌’ 사람들을 지우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악하다는 이유(주로 소문)로 악마, 마녀라는 낙인이 찍혀 잔인한 형벌을 받았다. 악이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악이란 그렇게 사냥하고 퇴치하면 제거되는, 마치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 같은 외계의 무엇일까? 원래 세상에 없었다가 불쑥 나타나 이 세상을 더럽히는 것일까?
2. 파가니니의 악마적 재능을 둘러싼 소문과 추측들
뮤지컬 <파가니니>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져 죽어서도 유언대로 고향 땅의 교회 묘지에 묻히지 못한 실존인물 ‘니콜로 파가니니(홍주찬 배우)’를 그의 아들 ‘아킬레 파가니니(박주혁 배우)’가 묻게 해달라고 청원해 재판이 열리면서 니콜로 파가니니의 삶을 되짚어보는 액자 구조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내가 액자 속에서 본 건 파가니니의 무고함보다도 악의 만연함이었다.

1막은 1836년 파리, 니콜로 파가니니가 사업가 콜랭 보네르(이준혁 배우)가 여는 ‘카지노 파가니니’에서 개관 공연을 하려다 틀어지면서 시작된다. 콜랭이 그곳을 도박장으로 쓰려던 걸 파가니니가 알아챈 것이다. 이로 인해 콜랭은 파가니니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되고 사제이자 이단 심문관인 루치오 아모스(김종구 배우)를 찾아간다. 콜랭은 이단을 처벌하는 일을 해온 루치오에게 파가니니의 재능과 그의 바이올린이 전 연인의 창자로 만들어졌다는 해괴한 소문을 언급하며 악마인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단들을 처벌하다가 무고한 사람이 죽은 적이 있었기에, 루치오는 신중하게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고 답한다.
콜랭은 루치오를 파가니니가 주로 활동하는 살롱에 데려가서 파가니니의 기괴한 음악에 심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신한 루치오는 파가니니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한편, 파가니니는 자신과 공연할 오페라 가수를 구하다 콜랭의 약혼자 샬롯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길 거부한 샬롯은 남몰래 오페라 가수를 꿈꾸고 있었다. 샬롯의 열정과 재능을 알아챈 파가니니는 그녀와 무대에 같이 오르기로 한다. 그러나 루치오가 샬롯에게 접근해 파가니니에 관한 해괴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샬롯은 잠시 파가니니와 멀어지게 된다. 그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파가니니는 무대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하는데, 현이 하나 빼고 모두 끊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럼에도 파가니니는 엄청난 연주를 해낸다.
3. 파가니니를 둘러싸고 드러나는 악의 본색들
콜랭은 2막에서 본색을 드러낸다. 약혼자인 샬롯이 파가니니와 가깝게 지냈던 걸 알아채고는 장사꾼이었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샬롯을 방에 가둔 것이다. 이에 파가니니가 자신의 공연 수익을 콜랭에게 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함으로써 샬롯은 풀려나게 된다. 한편, 파가니니가 악마라고 확신했던 사제 루치오는 콜랭의 집사의 고해성사를 통해 파가니니가 자신의 돈으로 샬롯을 구하려 했다는 걸 알고서 흔들린다. 그가 알기로 악은 타인을 위한 선의를 베풀지 않기 때문이다. 파가니니가 악마가 아닐 수도 있다고 흔들리는 와중에 콜랭이 나타난다. 루치오는 콜랭에게 파가니니가 준 그 검은 돈을 가지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콜랭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대꾸하면서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한다.
1막에서 세속적 합리성을 가진 콜랭과 종교적 합리성을 가진 루치오 두 사람 모두가 파가니니가 악마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보며 두 캐릭터의 개성을 충분히 느꼈던 나에게 2막의 이 대립은 의외이자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콜랭은 검은 돈은 받으면 안 되고 교회에 환속해야 한다는 루치오의 말을 무시하면서, 사제 앞에서 집사의 고해성사가 진실이라 생갹하느냐고 되물으면서, 자기가 악마라고 아주 자신 있게 자처하면서 루치오의 과거를 들쑤시기 시작한다. 무고한 사람을 죽였던 그 일에 대해서 말이다. 악을 처단하는 선이 악행을 저질렀다면 그 선은 위악에 다름없지 않을까? 이런 질문이 루치오를 맴돌기 시작하자 콜랭은 그를 더더욱 몰아세운다.
타인의 악을 지적했던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자신이 악마임을 자처하고 한 사람은 자신이 악마이지 않나 두려워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 나는 이 장면에서 두 배우가 정말 빛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악이란 이렇게나 세속적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해 보면 악은 파가니니가 천재적인 바이올린 연주로 맹위를 떨치기 전부터 있었다. 불법으로 도박장을 운영하려던 누군가한테, 종교 권력을 업어 타인을 단죄하던 누군가한테.
그러나 루치오는 간신히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온다. 선을 희구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사제의 자리로. 개인적으로 종교가 없지만 그의 신념은 존경할 만하다 여겨지는 장면이었다. 한편, 바티칸에서 악마인 파가니니를 처단하러 사람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콜랭한테서 들은 루치오는 다급해진다. 막대한 돈으로 거대한 건물을 세우고 있는 그곳, 사제인 루치오가 보기에도 이미 악에 찌든 그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타겟을 살려줄 생각이 없단 걸 알아서다.
한편, 샬롯을 구해준 파가니니는 자신에게 따라붙는 악마라는 소문을 더욱 환대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티켓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그는 그렇게라도 샬롯을 살리는 동시에 자신의 예술을 더 많이 선보이려고 한다. 그의 체력으로는 무리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열정으로 임하는 모습을 보고 샬롯은 그와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 열정이 빛날 때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루치오는 파가니니에게 바티칸에서 사람들이 오고 있다고 말하면서, 악마임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증서를 내밀며 여기에 서명하면 어서 우리 교회로 피신해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파가니니는 공연을 강행하겠다고 말하며 자신을 몰아세우는 루치오를 향해 내가 악마다, 라고 소리치지만 끝끝내 증서에 서명을 하진 않는다.
4. 악의 인정과 초연
파가니니가 자신을 악마라고 말한 건 정말 자신이 악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계속 억압하고 구속하는 그 말을 내 입으로 선언해야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단 걸 깨달아서다. 악이 주변부를 맴돌다 그의 입으로 불렸을 때, 그는 악에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연주의 길로 떠났다.

나는 악이란 특수하고 구체적인 무엇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파가니니한테 그런 것처럼 쉽사리 악마라는 오명이 붙을 수도 있는 반면, 콜랭이나 루치오가 그런 것처럼 쉽사리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악은 사회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고,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게 악이다. 파가니니는 그런 악에 초연하려고 했다. 초연하기 위해 악을 인정했다. 그 모습에서 나는 그의 인간다움을 본 것 같았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최선을 선택하는 것인 듯하다.
아들 아킬레 파가니니의 변호와 호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은 사제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니콜로 파가니니는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다가, 삼십 년 후, 아킬레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교황청에 환원하겠다고 하자 묻히게 된다.-이런 후일담에서도 악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 걸까?

극 자체로 보면 세상에 만연한 갖가지 악들이 드러나면서 파가니니의 삶이 묻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파가니니는 세상의 악에 질식하는 대신 그 공기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선보였다. 배우가 실제로 연주한 파가니니의 대표곡이 락밴드 사운드와 어우러지는 후반부 장면은 정말이지 오명에 시달린 한 사람의 발악이자 자유롭고자 하는 선언으로 보였다. 그 아슬아슬한 찰나에서 나는 선도 악도 아닌 파가니니, 오롯한 그의 목소리를 엿들은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