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공연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 번 지나간 무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숨 쉬던 장면뿐 아니라, 그 순간에 스쳤던 감정과 무대와 객석이 만들어낸 공기마저도 말입니다.

      

손에 쥐려고 하면 할수록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만 같은 기억들, 그로부터 오는 우울감이 한때는 평생 극복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놔줘야 할 것만 같은 감정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단순히 공연이 제게 남겨준 것들을 ‘잊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써낸 글들은 그것을 넘어선 다른 걸 말하고 있더군요. 저는 단순히 기록하는 것을 넘어, 공연이 제게 던진 질문을 다시 제 삶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실제로 제가 공연을 보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레 글을 쓰며 드러난 것이지요. 공연이 제게 던진 질문을 다시 삶에 던지는 과정에서, 어쩌면 저는 공연의 찰나성을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연에서 발견한 조각들을 차곡차곡 모아, 삶에 의미가 있도록 맞추는 것’. 공연을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공연을 통해 제 삶을 기록하고 있더군요.

 

날카로운 질문이나 평가보다는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 ‘공연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공연을 보는 나를 위해서’ 글을 써왔습니다.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쓰는 4개월의 시간 동안 참 많은 조각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뿌듯함이 남기도 하지만, 끝내 하나의 조각으로 완성하지 못한 글과 공연을 떠올리면 미안함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번 셀프 큐레이션을 통해 그 조각들 가운데 특히 오래 마음에 남았던 몇 편의 글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공연을 보고 쓰는 것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닮고 싶은 마음 한 조각 - 뮤지컬 '판'

 

[Opinion] 세상에 없는 책을 읽는 것 – 뮤지컬 ‘판’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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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되고 수습 기간에 썼던 첫 글입니다. 제 글을 처음으로 플랫폼에 선보이는 글이었기 때문에 어떤 방향성을 갖는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글만큼 제가 쓰고 싶은 게 확실했던 글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판’이라는 작품은 제가 공연을 보며 처음으로 극 중 인물을 보고 ‘닮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다른 좋은 작품들도 많은데 왜 하필 이 작품이었을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제가 가진 결핍과, 동시에 제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추운 겨울날, ‘슬픔을 잊고 웃음을 읽’게 해준 ‘판’ 속 인물들처럼,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온기를 꾹꾹 눌러 담은 글을 써내고 싶어 단어를 고르고, 글의 전개를 고민하고, 인용할 가사를 정하는 데만 며칠씩 걸렸습니다. 의도한 대로 글에 온기가 감도는 것 같아 만족스러우면서도, 정작 그 온기를 만들어낸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충분히 담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 따뜻함이 필요해질 때면 이 작품에서 발견한 ‘닮고 싶은 마음’ 한 조각을 꺼내어 보곤 합니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생 동안 읽고, 만들어질 그 책. 이 책과 함께라면 내가 살면서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을까. 마치 나를 위한 구절인 듯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들으며, 이 구절을 평생 기억하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소중해서 두려워질 때 - 연극 '빵야'


 

[Opinion] 기록과 증언, 그 위로 - 연극 '빵야'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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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제가 상반기 최고의 작품상을 줄 수 있다면, 두말없이 이 연극을 고를 것 같습니다. 그 감동이 퇴색될까 봐 감히 여러 번 볼 생각도 못 하고 딱 2번만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극을 보고 나와 꼭 이 작품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글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기도 했고, 행여 이 글이 작품이 가진 감동을 다 표현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무섭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드라마 작가 ‘나나’와 장총 ‘빵야’가 등장합니다. 나나는 빵야를 소재로 역사 드라마를 쓰기 위해 낡은 장총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다정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편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그녀의 손은 자꾸만 길을 잃어버립니다. 처음 관람했을 때는 빵야의 서사가 마음을 끌었다면, 두 번째 관람에서 제 시선은 자꾸만 나나의 손을 따라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녀의 마음에 공감이 가서였을까요.

   

 

그녀의 고민은 작가로서 무엇을 써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써낸 글들이 가진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빵야를 통해 들은 비극적인 역사를 이야기로 써내는 행위에 대해서 그녀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는 의미가 있다'라고 답하지만, 그것이 순전히 작가적 욕심 때문에, 대본의 성공을 위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한다. 무언가를 쓸 자격에 대해 논하는 일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빵야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나나를 보면서, 글을 쓸 때 소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극 중 나나가 미처 세상에 나오지 못한 이야기(편성에 실패한 시나리오) 속 인물들을 한 명 한 명 언급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제가 지금까지 써 온 글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내 글을, 혹은 소재들을 부끄럽지 않은 방식으로 대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질문은 글을 넘어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로 향했습니다. '나는 정말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에 마음을 다하고 있을까?' '만약 언젠가 그것이 텅 빈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만큼 좋아하기 때문에 진심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는 일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많은 두려움 또한 주는 것 같습니다.

 

한 배우가 이런 말을 했었더랍니다. 무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한순간이라도 연기를 대충 하려는 생각이 들면 그만두겠다고 말입니다. 이 배우의 말과 나나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주진 않더라도, 삶의 태도를 한 번 점검하는 느낌이랄까요, 적어도 제가 그들에게서 보았던 모습들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의 마지막에 나나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결국 완성되지 못한 글임에도 빵야의 꿈을 이뤄주려는 모습이 그 어떤 순간보다 ‘진심’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런 귀중한 마음 하나를 나나에게서 엿볼 수 있어 못내 아름다웠습니다.

 

 

 

가능성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 -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Opinion] 역사가 덜컹거리던 순간, 가정법이 남긴 흔적 -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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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저에게 새로운 도전과 같은 글이었습니다. 앞서 다룬 두 글이 개인적인 감정과 태도를 담은 글이었다면, 이 글은 조금 더 넓게 보아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발견하여 글에 녹여내고자 하였습니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서로 다른 교육 방식,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름의 자리를 찾아가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지만, 역사, 문학, 예술과 같은 주제들은 극의 깊이를 더해주고, 의도한 듯, 의도하지 않은 듯 보이는 극 중 장치와 언어들이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내는 작품이었습니다.

 

헥터와 어윈 두 사람의 교육 방식을 비교하여 교육과 관련된 글을 써 볼 수도 있었고, 극과 인물이 품고 있는 아이러니를 따라가 보고도 싶었습니다. 아예 다른 느낌을 내어 극 중 등장하는 여러 문학 작품들이 각 상황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다뤄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글에서 왜 ‘역사’라는 시선을 택하였냐 하면, 사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극의 제목이 ‘히스토리’ 보이즈였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에 초점을 두고 극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극이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전환의 순간과 그 과정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품은 서로 다른 두 교육관의 충돌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인간의 성장과 정체성, 역사와 예술을 해석하는 방식 등을 다루는데, 동시에 극 자체를 하나의 역사처럼 구성한다. 극 중간중간 녹음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의 나레이션은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지나간 과거 속 한 장면을 재생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지금 눈앞의 결과뿐 아니라, 그러한 결과에 이르기 전 존재했던 수많은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들까지 함께 떠올리게 만든다. 극장을 떠난 뒤에도 수시로 떠오르는 가정들은 이 극의 그 무엇도 쉽게 단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저는 인연과 타이밍이 가지는 힘을 꽤나 강력히 믿는 편입니다. 그리고 이 힘은, ‘만약에 그러지 않았더라면’, 라고 생각하게 될 때 더 크게 다가오곤 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특히 어윈이라는 인물이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를 통해 역사가 얼마나 많은 우연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삶의 이러한 면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이는 방식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녹음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장면이 잠시 정지하고, 조금 전까지도 장면을 구성하던 인물이 직접 과거를 회상하듯 나레이션을 내뱉으며, 장면들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브레이크’는 극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치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는 좀처럼 그런 순간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과거를 되짚어 보는 것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역사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극이 흥미롭게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는 이미 선택된 결과뿐 아니라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까지 함께 비춘다는 점이었습니다.

   

 

극은 전환의 지점은 명확히 보여주되, 그 결과에 끊임없이 다른 가능성을 끼워 넣음으로써 자꾸만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그랬더라면/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하나의 결과를 본 듯하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여운을 남긴다.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 여러 가능성과 함께 살아가는 감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지나간 선택을 돌아보며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역시 언젠가는 하나의 역사가 되고, 또 다른 가정법의 출발이 되겠지요. 이것이 이 작품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된 감상은 아닐지라도, 이것이 제가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연극을 본 방식이었습니다.

 

   

기억이 그 순간을 붙드는 일이라면, 감정은 그 순간을 현재에 머물게 하는 것 같습니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그때의 감정과 느낌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더군요. 공연만큼 기억과 감정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예술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변화는 어쩌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을 붙들고 살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때의 감정이 지금의 저를 붙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정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기억은 뒤따랐습니다. 기억은 감정과 함께일 때 더 오래가는 법이니까요.

 

결국 모든 것의 시작이 공연의 휘발성이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사라짐으로써 의미가 있는 예술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들을 찾는 일이 과연 옳은 방향인 것일까, 의문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공연을 통해 나와 세상을 좀 더 이해해 보고자 했던 시간들이 결국 제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렇게 모아 온 조각들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공연을 보고, 글을 써 내려갈 것 같습니다. 긴 큐레이션을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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