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사랑은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준다. 적당함은 상처받지 않도록 나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사랑도, 이별도 다치지 않을 만큼 강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쉽지 않다. 사랑을 적당히 할 수 있다면 왜 그토록 수많은 작가, 가수, 배우들이 비극을 쓰고 노래하고 연기하겠는가.
뮤지컬 <서편제>엔 자신을 비극으로 내던지는 사랑을 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소리를 미친 듯이 사랑해 자식들에게 꿈을 강요하고 딸 눈을 멀게 한 아버지 유봉. 그런 아버지에게 반발해 소리로부터 달아났지만, 자신만의 소리와 누이를 평생 사랑한 동호. 동생을 떠나보내고, 눈이 멀고, 아버지를 잃고 홀로 길을 떠돌아도 소리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며 경지에 오르는 송화.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 평생 소리길을 헤맨 이들은 적당히 사랑하지 못했다. 송화, 동호, 유봉의 사랑은 가슴 저미는 ‘한(恨)’이었다.
원작 계약 종료와 함께 2022년을 마지막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던 뮤지컬 <서편제>가 4년 만에 극적으로 돌아왔다. 한국 문학 거장 이청준의 연작 소설 <남도사람> 중 <서편제>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은 2010년에 초연된 창작 뮤지컬이다. 2012년 재연, 2014년 삼연, 2017년 사연을 거쳐 2022년 오연까지 꾸준히 관객을 만난 극은 판소리와 발라드, 팝, 록까지 여러 음악 장르가 조화를 이뤄 ‘한’과 ‘소리’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길을 걷는 작품이다. 이는 한 사람의 삶이 하나의 선율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도 뜻한다.
‘서편제’는 판소리 유파 중 하나로, 전라도 섬진강 서쪽(광주·나주·보성·강진·해남)을 중심으로 이어져 와 서편제라 불렸다. 동편제와는 달리 서편제는 부드럽고 애절하고 섬세한 소리를 내며, 소리 끝을 길게 끄는 것이 특징이다. 서편제 창법과 어울리는 창으론 ‘심청가’가 있다. 뮤지컬 <서편제>의 클라이막스이자 엔딩 또한 송화와 동호가 수십 년 만에 재회해 함께 완성하는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이다.
유봉 친딸 이송화와 의붓아들 김동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소리길을 걸으며 오누이로 자랐다. 동호 친어머니는 유봉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났다. 어린 아들을 줄에 매 놓고 밭일을 한 동호 어머니는 아들에게 묶여 다른 인생을 꿈꿀 수 없었다. ‘사랑에 빠져 마음에 줄을 매겠지, 미워져 묶인 줄을 다시 자르겠지’(‘혼자 있는 자유’ 넘버 중)라 하던 동호 어머니는 이승에 묶인 줄을 끊고 떠나고, 동호는 송화와 유봉에게 묶인다.
소리에 대한 집착에 묶인 유봉은 송화와 동호에게서 소리꾼 재능을 발견한다. 학대와 폭력으로 남매를 소리에 묶어버리는 유봉은, 줄에서 동호를 놓친다. 어릴 때부터 서양 음악에 이끌렸던 동호가 ‘스프링 보이즈’ 밴드 오디션을 보고, 그들을 따라 다른 소리길로 떠나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원망스러운 아버지로부터의 도망, 서양 소리를 향한 열망은 송화와의 애틋한 정까지 끊어냈다.
유봉은 떠난 동호를 원망하지만, 송화는 그를 그리워한다. 몸은 아버지에게 매여 있지만 마음은 동호를 찾아 허공을 떠돌던 송화의 눈은 멀어버린다. 딸마저 자신을 떠날 것이라 직감한 유봉이 약을 바른 천으로 송화의 눈을 묶어버린 것이다. 천륜을 져버린 유봉은 훗날 미안하단 말만 유언으로 남긴 채 동호 어머니를 따르고, 송화는 혼자가 된다. 한편, 싱어송라이터로 크게 성공한 동호는 송화를 오랫동안 찾아 헤맨다.
소리 외에는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삶을 살게 된 송화는 동호를 계속 피한다. 그럼에도 동호는 ‘소리를 청하는 사람’이자 고수로, ‘소리를 부르는 사람’이자 소리꾼으로서 동생과 재회한 송화는 심청가의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함께 완성한다. 그렇게 송화와 동호는 각자의 소리를 찾은 예인으로 재회하며 서로에게 다시 묶인다.
작품은 어머니가 밭일을 나가며 어린 동호를 줄로 묶는 장면(‘거대한 햇덩이’), ‘혼자 있는 자유’ 넘버 가사(‘한때는 멀리 떠나려 했지만 난 너에게 묶였단다’), 송화와 유봉이 줄로 서로를 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소리길을 걷는 장면, 눈이 머는 약을 묻힌 끈으로 송화 눈을 묶는 유봉, 동호 어머니를 따라 줄을 잡고 저승으로 떠나는 유봉의 모습(‘부양가’) 등에서 줄로 묶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는 끊어지지 않는 가족 간의 질긴 인연과 애증을 상징한다. 죽도록 미워도 결국 돌아갈 곳은 가족과 고향이라는 정서는 지극히도 한국적이다.
이처럼 뮤지컬 <서편제>는 한, 무슨 짓을 해도 끊어지지 않는 가족의 인연, 어머니와 누이를 향한 동호의 절절한 마음, 자식들을 향한 유봉의 도를 넘은 집착 등 한국인들이 특히 공감할 수 있는 정서로 가득한 한국 창작 뮤지컬이다. 이지나 프로듀서는 ‘이제 우리 이야기는 전통 소재에 대한 해묵은 오해를 벗고, 동시대 관객의 마음을 두드리는 굳건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고 2026년 시즌을 맞는 소감을 밝힌 바 있다. 한국적 형식과 정서는 특수성이기도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이기도 하기에 작품은 오랜 시간 사랑받은 것이다.
소리라는 소재 외에도 한지를 겹겹이 덧붙여 만든 순백의 무대, 400여 장의 한국화를 빛으로 다시 그린 수묵의 영상, 동양화처럼 여백을 남기는 장면들 또한 한국의 미(美)를 구현한다. 무대 또한 음악처럼 한 사람의 삶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뮤지컬 <서편제> 음악을 작곡한 윤일상은 대중음악 작곡가인 자신에게 뮤지컬은 낯선 세계였고, 뮤지컬스럽게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뮤지컬이란 장르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 음악을 만들며 국악 뮤지컬이 아닌 ‘우리의 소리가 자연스레 녹아든 뮤지컬’로 곡을 썼다고 소회를 밝혔다.
뮤지컬 <서편제>는 특수성과 보편성, 옛 감성과 동시대적 감각, 우리 음악과 서양 음악이 어우러져 독특한 색을 내는 작품이다. 이런 독특함은 뮤지컬 배우와 소리꾼이 함께 출연하는 캐스팅에서도 드러난다. 뮤지컬 배우에게도, 소리꾼에게도 도전인 작품이 <서편제>다.
송화 역으로 초연부터 모든 시즌에 참여하며 예술감독도 겸하는 이자람, 국악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소리꾼 김준수는 ‘소리꾼 남매’로 불린다. 중요 무형 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적벽가 이수자 이자람은, 최연소(20세)·최장 시간(8시간) 춘향가 완창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린 국악인이다. ‘아마도 이자람 밴드’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이자 <프리마 파시>를 비롯한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하는 배우 이자람은, 판소리 작창·작곡에도 능한 종합 예술가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4호 판소리 수궁가 이수자 김준수는 국립창극단의 주역으로 오랫동안 훌륭한 기량을 증명했으며, 방송·뮤지컬 및 연극에도 꾸준히 도전하며 거침없는 행보를 걸어왔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굵직한 이력을 써 내려간 이들은, 2022년·2026년 <서편제>에서도 굳건한 실력과 소리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하며 깊은 여운과 감동을 남겼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코 송화와 동호가 ‘심청가’를 함께 완성하는 엔딩일 것이다. 젊을 땐 다른 소리를 찾아 떠났지만, 평생 송화를 잊지 못해 돌아온 동호의 귀향은 우리 삶과도 닮았다. 어머니를 잃고, 눈을 잃고, 아버지를 잃은 송화에겐 남은 건 소리뿐이었다. 그렇기에 소리는 송화에게도 고향이자 무덤이다.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서 크게 성공한 동호의 소리는 서양 것이었지만, 그의 고향은 송화이자 우리 소리다.
평생을 엇갈리며 각자의 소리길을 돌다 재회한 두 예인이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경지에 오르는 심청가 장면은 그래서 울림이 남다르다. 그러한 감동은 그들이 삶과 꿈을 적당히 사랑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자신의 소리를 죽을 것처럼 사랑한 송화와 동호는 상실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랑하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소중한 이를 보내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어도 그들은 소리에 인생을 걸었다. 그리하여 얄궂은 운명과 비극에 맞서 생존한 송화와 동호의 화합은 심 봉사가 ‘눈을 번쩍’ 뜨는 것 이상으로 마음에 깊숙이 박힐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