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뮤지컬에 대해 물어보면 줄거리보다 넘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주인공이 울면서 노래하는 어떤 넘버가 좋았어, 어떤 넘버가 상황이랑 좀 안 어울렸어 등이다. 넘버는 뮤지컬에 사용되는 노래를 말한다.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이나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모두 넘버다. 넘버는 뮤지컬 속에 삽입돼 대사를 대신하거나 줄거리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뮤지컬을 관람하는 한 가지 요소이며 작품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지만, 어쩔 수 없이 서사가 빈약해질 있다는 양면성을 가졌다.
나는 뮤지컬을 많이 보았거나 주기적으로 즐겨 온 매니아는 아닌지라 어떤 게 좋은지, 혹은 어떤 게 감정이 잘 표현되었는지 모른다. 그저 좋아하는 배우, 좋아하는 노래, 나도 모르게 전율이 오는 노래들을 때때로 듣는다. 요즘은 레미제라블의 노래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30일 밤의 뮤지컬>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뮤지컬 얘기로 가득 찬 책이다. 유명한 작품들을 주로 다루어, 작품의 창작진과 등장인물을 소개한다. 넘버의 유명한 곡이나 배우의 연습 영상 QR 코드를 삽입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외국 작품이지만 한국에서 공연한 것을 기반으로 설명한다. 최재림, 조승우, 홍광호 등 익숙한 배우를 언급해 놓음으로써 직접 보지 않은 작품에도 친근감을 주고 궁금증을 유발했다.
제목에서 '30일 밤'이라 알려주듯 이 책은 뮤지컬 작품 30개를 소개한다. <오페라의 유령>이나 <데스노트>처럼 유명한 것부터 뮤지컬보다는 시가 더 익숙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영화로 더 익숙한 <신과 함께>까지 다양한 작품으로 책을 구성했다.
한 편의 이야기가 연기, 노래와 춤, 무대를 채우는 다채로운 장치로 펼쳐지는 뮤지컬은 완성도 높은 종합예술이면서 가장 대중적인 공연예술입니다. 얼핏 화려하게만 보이는 그 무대에는 각기 다른 시대상과 문화,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인간의 깊고 은밀한 내면이 담겨 있죠. 30일 밤 동안 자기만의 시공간에서 30편의 뮤지컬을 감상하며 색다른 감동을 느껴보면 어떨까요. 뮤지컬 대표작을 알고 싶은 입문자부터 주요 작품을 심도 있게 관람하고 싶은 마니아까지 저마다의 커튼콜과 감흥을 경험하고 또 나눴으면 합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지킬 앤 하이드
책에 따르면 <지킬 앤 하이드>는 배우들이 공통적으로 손꼽는 희망 작품 중 하나다. 남자 배우들은 '지킬'을, 여자 배우들은 '엠마'나 '루시'를 원한다. 지킬(하이드)은 1인 2역으로 선악이라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을 폭넓게 보여줄 수 있고, 엠마와 루시는 1인 2역은 아니지만 각각의 캐릭터를 자기 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점에서 마음이 가는 듯하다.
이 작품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넘버 때문에도 있지만, 이 1인 2역이라는 점으로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지킬 앤 하이드인 줄 알았네"라는 말을 하듯이 말이다. 그 1인 2역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넘버가 있다. 바로 'The Confrontation'이다. "지킬이 처음 약품을 투입하고 서서히 거친 하이드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경우 1인 2역을 하게 되면 대역을 써서 촬영하거나 각각 촬영한 뒤 합치는 방법을 쓴다. 뮤지컬도 의상을 바꿔 입고 나오거나 목소리를 바꾸는 등 변화를 주지만, <지킬 앤 하이드>는 동시에 두 캐릭터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이 넘버를 부른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의외로 간단하다. 배우가 지킬 앤 하이드 분장을 각각 반반씩 하고, 조명 앞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가며 연기한다. 단순히 두 가지 분장을 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 표정, 몸짓 등에 변화를 주어야 하기에 배우의 역량을 많이 필요로 하는 역할로 보인다. 그 관람 요소가 사람들의 발을 <지킬 앤 하이드>로 이끄는 것 아닐까?
작가는 한국적 재해석도 <지킬 앤 하이드>의 강점으로 뽑았다.
(...) 국내에 수입되는 라이선스 작품들은 크게 '레플리카' 또는 '논 레플리카' 형태로 계약이 이뤄지는데요. '복제'라는 뜻에서 집작할 수 있듯이 '레플리카'는 음악과 가사는 물론 무대, 의상, 안무까지 원작과 똑같아야 합니다. 국내에서 캐스팅된 배우가 한국어로 공연할 수 있는 권리만 허용된 거죠. 반면 '논 레플리카'는 범위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원작의 큰 틀을 유지한 채 수정과 각색이 가능합니다. <지킬 앤 하이드> 역시 원래의 대본과 음악을 바탕으로 국내 관객들의 구미에 맞게 이른바 '한국화'를 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역대 캐스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킬 박사가 젊고 매력적인 인물로 바뀌었다는 점인데요. 초연 당시 조승우 씨의 나이는 24세로, 전 세계 프로덕션에서 역대 최연소 지킬이었습니다. <지킬 앤 하이드>는 대사와 노랫말에도 변화를 꾀해 우리말이 가진 언어유희를 반영했고, 기존의 복잡했던 세트 디자인도 드라마와 배우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심플하게 수정했습니다. (...)
이로 인해 <지킬 앤 하이드>는 2015년 2월 15일 1000회 공연을 달성했다고 한다. 배우 캐스팅도 중요하지만, 작품의 구성을 우리나라에 맞게 각색했기에 이런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 작품과 같은 외국이 시초인 작품은 몇 년에 한 번 공연하거나 매년 몇 달을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 <지킬 앤 하이드>는 2025년에는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천안에서 공연한 것이 가장 최근이다. 기회가 되면 꼭 보기를 권한다.
어린이가 주는 감동, 마틸다
뮤지컬 넘버 중에 좋아하는 것 하나가 마틸다의 'Naughty'다. 어린이의 예쁜 목소리로 당차게 무대를 꾸미는 그 넘버가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다.
우리나라에 <마틸다>가 뮤지컬로 처음 공연된 것은 2018넌이다. 성인 배우도 있지만, 주연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물론 곳곳에 등장해 그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성인 배우와는 또 다른 매력과 감동을 준다.
뮤지컬 <마틸다>는 처음 들었는데도 귀에 착착 감기는 노래와 그 음악에 딱딱 들어맞는 독창적인 안무 덕분에 제작진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날 정도입니다. 넘버는 동요의 단순한 멜로디부터 팝, 소울, 살사까지 실로 다양한 장르인데요. 한 곡 안에서도 다채로운 음악적 뱐화가 있어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이 풍성한 음악이 지금껏 본 적 없는 안무들과 결합되고, 그 노래와 춤을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선보이는 재미는 어느 판타지 동화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나는 <마틸다>를 뮤지컬 작품은 보지 못했고 넘버 영상만 봤다. 책상 위에서 몸을 쓰거나 여럿이서 맞추는 칼군무를 볼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많은 시간을 썼을까를 생각한다. <마틸다> 영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댓글 중에 하나가 '번역'의 아쉬움인데, '똘끼'라는 말을 다르게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도 생각하곤 한다.
작가는 <마틸다>를 "동화 속에 담긴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와 생동감 넘치는 문체, 속도감 있는 전개와 독특하고 기괴한 캐릭터, 유머러스한 풍자와 꼬집기를 무대만의 화법으로 펼쳐 보이며 또 한 편의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켰다고 평가했다. 누구보다 씩씩한 외침을 들려주는 이 작품을 언젠가 꼭 보고 싶다.
<30일 밤의 뮤지컬>은 각 작품의 특성과 주안점을 꼬집으며 친절하게 독자에게 다가간다. 뮤지컬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작품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주고, 작품을 잘 알고 있고 본 사람에게는 공감과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게 해 준다. 책 중간중간 삽입된 사진도 볼거리다. 무대 사진이나 배우 사진이 책 속에 알맞게 배치되어 있어 보다 더 재밌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단지 유명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만 해도 궁금해지는 이야기로 목차를 짠 것도 이 책의 장점 같다. 배우들의 워너비 뮤지컬, 동물을 캐스팅한 뮤지컬, 시인의 뜨겁고 시린 이야기, 만화 찢고 나온 뮤지컬, 시대를 앞서간 기괴한 뮤지컬 등 카테고리를 구성해서 각 테마마다 두 개의 작품을 넣었다. 어떤 작품인지 몰라도 테마 제목으로 어떤 내용일지 예측을 해볼 수 있었고, 나의 예측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며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유명한 작품을 다루고 있다 해도 보지 않은 작품이 더 많았지만, 그래서인지 언젠가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었다. 뮤지컬의 전반적인 맥락이나 뮤지컬 용어를 알려주거나 설명을 해주고 있어 읽는 데 어려움도 없다. 뮤지컬을 좋아하거나, 뮤지컬에 재미를 붙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