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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문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 문장독본 [도서/문학]

by 유민 에디터
2024.09.28 21:26


 

우리는 매일 문장을 쓴다. 시 또는 소설 작법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꼭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형식의 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 문장을 고민하고 만들어낸다. 그럴 때마다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에 골몰하며 이리저리 글자들의 조합을 다듬기 마련인데, '문장이 무엇을 향해 가는가'에 대해 나는 과연 몇 번이나 관심을 가지고 다루었을까. 돌이켜보면 그러한 방향성에 대한 고민의 어느 한 모퉁이에 언제나 미시마 유키오가 서있었던 것만 같다.

 

내가 처음 미시마 유키오를 접하게 된 것은 <금각사>로, 일전에 아트인사이트에 한 번 기고를 한 적이 있다. 그토록 유려하고 섬세한 문장 속에 담긴 까닭 모를 청묘함과 동시에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구탁함이 느껴지는 소설 <금각사>는 미시마 유키오가 고백 고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 주제 의식보다도 특유의 문체가 먼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소설이다. 혹은 확장과 수축을 되풀이하는, 아름답기에 불안한 문장들의 모음집이다.

 

그렇다면 미시마 유키오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문장들을 만들어냈던 것일까. 어떻게 자신의 어두운 심연과 같은 바다 속에서 문장들을 하나하나 육양하여 책 속으로 꺼내놓았던 것일까. 미시마 유키오는 독특하게도 그에 대한 비밀의 수첩을 너무나 솔직하고 과감하게 세상에 공개했다. 그 수첩의 이름은 <문장독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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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장의 실체



 

나는 소설가이다. 책상에 앉아 있다. 공기 중의 질소와 산소를 합성해 어떤 약품을 만드는 사람처럼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엇인가 원소를 추출해서 그것을 문장으로 고정한다. 이런 일을 벌써 십수 년 계속하는데도 아직 기술에 기복이 있어서, 쉽게 써질 때도 있고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여러 육체적 정신적 컨디션이 나를 자극하고, 다양한 문학적 이념과 꿈과 현실이 나를 짓누르고, 글 한 줄에도 예술적 사회적 역사적 요구가 길을 가로막고 내 펜을 정체시킨다.

 

 

개개인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 가에 따라 글 한 줄에 '예술적, 사회적, 역사적 요구'를 담아낼 당위성의 유무가 결정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맥락의 고민을 반드시 전제한 문장들만을 작성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공에서 무엇인가를 추출한다는 것, 그것을 문장으로 고정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부분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머리 혹은 심장 속에 무엇인가가 이미 내재되어 있어서 그것과 관련된 단어들을 마구 나열하며 문장으로 연결시킨다 하더라도, 우선 그것들은 허공으로 떠오른다. 그것이 문장의 원소다. 그러한 원소들을 고정하고 단계적으로 배합과 가공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곧 문학적 이념과 꿈과 현실이 주는 무게감을 견뎌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머리가 아프다. 문장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내가 쓴 문장들이 모두 같은 층위의 문장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고 바위를 떠올리며 쓴 문장이 끝내 허공으로 흩어질 때, 분명 내가 써낸 문장들임에도 내가 그것들과 조금의 부끄러움 없이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프다.

 

 

 

2. 문장의 목적의식


 

그러나 항상 '문장이 어디를 향하는가'의 문제만을 고민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문제에 매몰되어 원하는 문장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주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풍자란 편견이 없는 눈으로 아무런 선입견 없이 다시 바라보았을 때 생기는 그로테스크한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본래 풍자는 일정 정치 목적이나 당파적 목적을 위해 특별한 목적의식을 갖고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 이에 비해 유머는 인간 생활 내부의 윤활유 같은 것이다.

 

 

풍자가 특별한 목적의식을 갖고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이 퍽 많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미시마 유키오에게 더없이 신랄한 비판을 쏟아부으며 목적의식이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제대로 된 풍자로서 기능할 수 있겠냐고 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모든 문장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대로 된 목적의식을 갖지 않으면 나의 문장들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보다 넓고 깊게 세상을 관찰하며 그것을 옹골차게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추가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가벼운 문장들 속에 내재된 무게감을 응시한다. 그들이 내게 '너의 문장들은 하나같이 무겁다'고 말한다. 무거운 것은 나라는 사람인가, 나의 문장인가.

 

그러한 고민 앞에 밀란 쿤데라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추가한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미묘하다."

 

 

 

3. 나는 무엇을 보는가? '문장 - 소설'



 

그러나 현대에는 문장을 맛본다기보다는 소설을 맛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작가의 문장이 좋다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고, 작가의 소설이 재미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문장은 소설의 유일한 실체이며, 말은 소설의 유일한 재료이다. 여러분은 그림을 볼 때 색채를 보지 않는가. 그런데 말은 소설의 색채이다. 여러분은 음악을 들을 때 소리를 듣지 않는가. 그런데 말은 소설의 악보이다.

 

 

문장은 과연 소설의 유일한 실체이다. 그리고 문장의 맛을 본다는 것은 대단히 본질적이다. 우선 맛이라는 것은 어떤 음식이라도 예외없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다. 하다못해 우리는 물에도 고유의 맛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문장들도 작가의 색채에 따라 저마다의 맛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설은 어떠한가? 사실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요리임과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모든 맛의 총합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하나의 완성된 요리가 주는 즐거움, 여러가지의 맛이 한데 어우려져 생성하는 풍미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요리를 즐길 뿐 재료를 맛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문장이 과연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문장인지, 다시 말해 적어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 좋은 문장인지 나쁜 문장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소설에서 대화란 큰 파도가 부서질 때 일어나는 하얀 물보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지문은 파도인데 앞바다에서 천천히 굽이쳐 들어와 뭍에서 부서지는 것처럼 더는 버틸 수 없어질 때까지 높이 쳐들었다가 확 무너질 때처럼 대화가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그 어떤 예술로도 하나의 바다를 담아낼 수는 없다는 이유로 소설을 파도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대화가 곧 파도가 부서질 때 일어나는 하얀 물보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문장이란 무엇인가. 문장은 물결이다. 물결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관찰자에 따라, 혹은 어느 특정 조건에 따라 분명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을 포착하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바다는 무겁되 파도를 통해 전해져오는 물결은 가벼우므로 나의 문장은 언제나 가벼워지고자 한다.

 

하나의 무거움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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