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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포말의 몸체를 한 백마 -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

들은 중 최고의 템페스트에 대함

by 서상덕 에디터
2022.09.09 14:20

 

 

말로페예프_리사이틀_포스터 최종.jpg

 

 

어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피아노 리사이틀에 다녀왔다. 초대가 온 즈음엔 매우 바빠서, 젊은 연주자의 리사이틀이구나 정도만 알아보곤 신청을 눌렀다. 프로그램도 유심히 보지 않았다. 베토벤 템페스트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르는 곡들이라서, 아아 그런가 보다 하고 마찬가지로 신청을 눌렀다. 롯데콘서트홀은 이번이 3번째인가 그럴 건데, 여러 번 와보았음에도 아직 가는 길이 익숙지 않다. 도대체 8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 헤매기가 일쑤였는데, 어제는 하마터면 지각할 뻔까지 했다. 1분을 남기고 허겁지겁 들어서려는 나를 보곤, 멀리 안내인이 종종걸음으로 맞으며 검표를 도와주었다.


 

Program

 

1부


L.v.Beethoven - Piano Sonata No.17 Op.31 No.2 'The Tempest'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N.Medtner - Piano Sonata in G minor, Op. 22

메트너 - 피아노 소나타 사단조, 작품번호 22

 

2부

 

A.Scriabin - 5 Preludes, Op.16

스크리아빈 - 다섯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16

 

A.Scriabin - 2 Impromptus, Op.12

스크리아빈 - 두개의 즉흥곡, 작품번호 12

 

S.Rachmaninoff - Etudes-Tableaux Op.33

라흐마니노프 - 회화적 연습곡, 작품번호 33


 

 

보도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서 채 몰랐는데, 이제 갓 약관을 지난 나이의 연주자였다니… 무대 위로 오르는 연주자의 얼굴이 매끈하고 젊어 흠칫 놀랐다. 검은색 착장에 대조되며 그의 하얀 피부와 노란 머리칼이 눈부시다. 내가 앉은 자리는 2층, 연주자의 등을 바라보는 방향이었음에도 그의 반짝이는 보드라움이 자세히 보이는듯했다. 연주자는 무대에 올라 한 번 꾸벅, 하곤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프로필 7.jpg

 

 

1분을 남기고 입장해서 자리를 잡자마자, 연주자가 등장했고 그는 꾸벅 인사를 하곤 자리에 앉아, 몇 번 들썩이다가 곧바로 연주를 시작한다. 여기까지의 모든 속도감이 참 좋았다. 이렇듯 거침이 없이 시작된 베토벤 템페스트, 귀에 익은 것은 3악장부터라지만, 1악장도 제법 들어둔 기억이 있다. 그건 마치, 참고서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책의 첫 챕터만 늙수구레 헤지게 하는 우리네 원리같이, 그것이 첫 번째에 위치한 것이었기에 자연스레 자주 접한 기억이다. 집중해서 들은 기억은 없지만, 어쨌든 책의 첫 챕터를 여러 번 다시 보게 되듯이 자주 듣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주저함이 생겨나지만, 그럼에도 그의 연주에서 특별함을 맡는다. 클래식 콘서트 리뷰마다 언급하는 내용인데, 클래식 콘서트가 유구한 전통의 같은 곡을 연주함에도 공연마다 각 다른 까닭은 연주자 나름의 곡 해석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겠고, 그것은 주로 박자감과 셈여림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템페스트 1악장에서 곧바로 캐치한 그의 해석, 그 새로움을 무어라 말해보아야 할까. 나는 들은 중 최고의 템페스트를 만났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감상평을 돌려주어야만 한다. 잠깐 고민이 생겨난다.

 

연주자의 등을 바라보는 내 자리, 그 등이 거진 다 가리고 있지만, 건반 위의 손가락이 보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안 보이지만, 손가락이 몸체로부터 멀어져 고음부를 가 누를 때는 빼꼼, 그 손놀림이 아주 잘 보인다. 얼마나 섬세한 터치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속도감을 지닌 터치인지 정도는 잘 알아볼 수가 있는 정도였다. 더불어 여기서는 그의 신체가 더욱 잘 보인다.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예컨대는 그의 목고개가 어떻게 숙여 들어가 있는지, 척추는 어떻게 접혀 있는지, 고개를 좌우로 얼마만큼만 돌려대는지, 섬세한 터치에 몰입했을 때, 어깨가 어떤 식으로 흐느끼는 모양을 이루는지 등등이 그렇다.


1악장을 대하는 저 연주자의 태도, 아직 그것은 엄중하지도 골몰해 들어가 있지도 않다. 그러니까 설명해보자면, 고개가 너무 숙여 있지도, 척추가 앞으로 굽혀져 기도하는 모양을 하고 있지도, 고개를 유장하게 저으며 느끼는 모습을 나타내지도, 터치 하나하나마다 어깨가 하늘 높이 쳐들리거나 부르르 떨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곡에 심취한 피아니스트가 아주 섬세한 부분에 접어들었을 때 선보이는 신체의 연주이다. 당연하겠지만, 1악장에서의 연주자는 이러한 모습이었다기보다는, 아주 담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음들에는 적당한 깊이의 사려 깊음이 베어 있었으니, 섣부르게나마 저 연주자의 뒷모습에서 대가大家적인 면모를 느껴본다. 내가 생각하기에 저 모습이란, 음들을 너무 잘 이해하고 깊이 느끼고 있음에도, 그것에서 빠져나와 거리감을 유지하는 모습이라서 그렇다.


템페스트 1악장 악보.png

<1악장, 악보에서도 전해지는 반복성과 구조적 통일감>



연주자에 대한 종전 나의 섣부른 인상은 박자를 다루는 그의 모습을 대하매 더욱 짙어간다. 음색은 똑 부러진다기 보다는 흐늘거리며 이어져 있는데, 박자를 아주 제멋대로 밀고 당기는 것이 기묘한 감각을 준다. 전반적으로 통일된 구성의 악장, 변칙적인 박자 운용은 내 기억 속에 없었는데, 본 연주자는 여기서 자신만의 해석을 당당히 선보인다.


템페스트 1악장은 아직 폭풍이 상륙한 시점이라기보다는, 이제 곧 그 태풍이 먼 남쪽 대륙에 상륙한다는 긴박한 소식과 함께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 여기 스산한 바람과 비가 전조로써 흩뿌려지고 있는 상황을 그려낸다. 전반적으로 통일되고 반복되는 구조감을 선사하고 있고, 유사한 전개의 마디를 반복하며, 서서히 음계가 올라가는 구성은 그러한 서늘한 긴장감을 고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라르고-알레그로-라르고로 템포 변화가 많은 악장이다. 느리게-빠르게-느리게, 한 개 악장 내에서 이렇듯 템포 변화가 많다 보니, 템포가 변화하는 구간에서는 종전의 박자감을 지워내고 새로운 전개를 시작하기 위해 휴지 休止가 발생한다. 기억하기로 본 연주에서는 휴지가 꽤 길었다. '이렇게 아주 멈추어버리려나? 그래도 되나?' 하는 위기감이 고개를 쳐들 정도로, 그리고 그 위기감이 고개를 들려고 하는 찰나에 음이 쏜살같이 튀어나온다. 1~2초 사이의 정적, 그리고 숨죽인 사람들과 긴장감, 이 정적인 긴장감이 좋았다.


넓은 홀에는 숨죽인 사람들로 가득하다. 다들 숨죽인 통에 내 만년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마저 면구스러운 정도인데, 그렇게 고요한 중에도 인기척과 집중하는 기색들이 여기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위의 휴지, 즉 여백을 통해 드러났다. 건반을 누르곤 떼지 않은 손끝으로, 긴 꼬리를 이루는 음이 공간에 퍼져 나간다. 그 꼬리 긴 음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여운과 여백, 넓게 울려 퍼지는 음이 공간으로 스러지는 가운데에서는 공간감마저 느끼게 된다. 휴지의 긴장과 해소의 찰나가 빠르게 반복되고, 이것이 저 연주자의 스타일, 즉 의도이리라는 믿음이 들 때쯤엔 여백 안에서 이런 것들을 느꼈다.


템페스트는 아무래도 3악장으로 가장 유명할 것이다. 1악장이 서늘한 긴장감을 그려냈다면, 3악장은 보다 긴박하다. 내 머릿속에서는 포말 泡沫의 몸체를 한 백마들이 폭풍우 치는 바다 위를 질주하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이따금씩 포르테로 내리꽂히는 저음부 반주는 그 어두운 바다 위를 내리꽂히는 번개 같다. 쉼 없이 내달리는 악장, 이 변화무쌍한 악보 위에서 연주자는 당당히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놀라울 정도의 완급조절을 선보이며, 신선한 해석을 주었다. 폭풍우처럼 웅장하며 계속해서 빨라지고 고조되는 감정을 상기시키는 본 악장, 연주자는 여기에 위태로움을 더하는듯하다. 기억 속의 정박 구성과는 달리, 마디별로 이루는 템포감이 각 조금씩 달라 다채로우며, 음이 고조되는 부분에서는 '어? 조금 많이 서두르나?' 싶은 생각이 앞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쳐 드려는 바로 그 순간, 0.5초의 순간 만에 그 긴장을 완화해버린다.



템페스트 3악장 악보.png

<3악장 2번째 장, 43~51마디 트릴부>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의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찰나의 순간 긴장을 유발하고 곧잘 해소시켜주는 그의 연주, 이 완급조절이 대단히 완숙하다고 생각했다. 박자감이라는 것은 전체 마디에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것은, 두어 개 마디를 빠르게 내달려버리면 그만큼의 박자 공백이 뒷편 마디에 생겨난다는 뜻이다. 연속적으로 트릴이 나오는 구간에서 속도를 확 끌어올리며 위기감을 주더니, 그 소절을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여남은 박자를 엿가락처럼 늘리어선 능숙하게 분배해버린다. 이런 과감한 해석들이 심지어 탁월하게 느껴지다니, 이게 정말 갓 약관을 넘은 연주자의 해석과 자신감일 수 있는가 의아했다.


3악장 맨 처음 나오는 주제 소절이자 유명한 소절, 끊어지지 않고 계속이 반복되는 그 소절은 내 안에 포말의 몸체를 가진 말들을 연상시킨다. 무언가 질주하는 이미지와 거침없음, 위아래 변화무쌍이 출렁이는 것으로서 폭풍우와 바다의 이미지를 가지는 동시에 피아노의 양털 망치가 자아내는 그 음색 특유의 보드라움이 합쳐진 것으로서 그렇다. 포말의 몸체를 한 백마, 이런 이미지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포세이돈의 말들이 있어, 그림을 찾아 응시하며 템페스트를 틀어두었다.



131.jpg

Neptune's Horses

Walter Crane(1845~1915)

1892

Oil on Canvas, 215x86cm



연주회가 끝나고 글을 쓰는 지금, 때마침 곧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다. 과연 바람이 스산해져 있다. 빈방 서재에는 스산한 그 소리에 더불어, 양털 망치로 만든 말발굽 소리가 가득하다. 이렇게 온화하게 내달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저기 흐린 회색 하늘 위로 포말의 몸체를 한 백마를 그려본다. 그리고 이미 기억 속에 소실되어 가고 있는 말로페예프의 템페스트를 이 이미지로 갈무리해두고 싶어진다. 그것이 내가 들어본 템페스트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템페스트와 다른 그 무언가, 의도된 위태로움과 긴박감마저 가지고 있었기에, 이렇듯 특별한 것으로서 각인해두고 싶은 마음이다. 내 가진 조악한 비유 중 몇 안 될 아름다운 것을 간추려, 이 기억 위에 얹어두고 싶어진다.


**


한 주가 지났다. 태풍 힌남노는 예상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육지를 할퀴고 지나갔다. 바다와 하늘의 공기를 서로 뒤바꾸어 놓은 듯,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남은 여름이 지워지곤 가을이 찾았다. 그 지나간 자리엔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이 또 있겠으나… 기억 속의 말로페예프는 지나버린 폭풍에 대한 기억처럼 단 한 주 간 만에 벌써 사라지고 있다. 지금 맑게 개어버린 하늘 위론 백마들의 질주가 잘 연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또다시 바람이 스산해지는 어느 미래에, 나로 하여금 템페스트를 꺼내어 듣게 하는 마음이 거기 여전히 있다면 그것은 말로페예프가 남긴 흔적이요, 오늘 새겨둔 기념비의 작용이 되어 줄 것이다.


한편 음악회를 찾아가는 일이란 내게 있어, 모르는 음악을 만나고 가끔 새로운 사랑의 계기가 되어주곤 한다. 음악을 잘 찾아 듣는 편이 아니라서 그렇다. 안타깝게도 이번 음악회의 프로그램 중 여다른 것들과는 사랑에 빠지지 못했다. 미리 들어두지도 않았으며, 거기서 매료되는 순간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들은 중 가장 아름다운 템페스트를 만났으며, 이렇듯 추앙한다. 그것만으로도 넘치게 족하다고 생각한다.


 

 

컬쳐리스트 태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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