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구, 지인과 같은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잘 내지 않는다. 내겐 사람에게 세 번의 기회를 준다는 철칙과 함께 인내의 선이 있는데, 그 선이 높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넘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를 내는 것에서 에너지 소모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누가 봐도 화를 낼 만한 상황에도 묵묵히 침묵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까지 들은 소리가 호구였다.
“호구야? 왜 가만히 있어?”
그런 소리를 들으면 늘 당황했다. 별로 화나지 않는 상황에서 왜 화를 내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떤 친구가 내게 외모 비하를 해도, 자기 과제를 도와달라 부탁하여 늦은 시간까지 붙잡혀 피곤한 상황에도. 나는 화를 낼 생각이나 불평 같은 걸 하지 않았다.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다.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에너지 소모하는 거라 생각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어머니와 잦은 트러블이 있었다. 어머니와 성격이 비슷했기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 생활을 해도 주말마다 집에 가면 늘 어머니와 감정적으로 부딪혔기 때문에, 주말이 지나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항상 지친 상태였다. 이미 집안에서 감정 소모를 많이 했기에 학교에서까지 그런 걸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 사람이 평소에 화를 낼 때 드는 에너지가 100%라 한다면, 집과 학교를 기준으로 했을 경우 내겐 집이 100%였고 학교가 0%였다. 편협하게 비율이 맞춰진 것이다.
에너지 소모라고 생각했던 게 잘못된 거였을까. 대학생이 되고 난 후 어머니와 부딪히는 것조차 에너지 소모, 감정 소모로 생각하게 되었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가족과 완전히 따로 살게 되었을 땐 거의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간혹 전화로 어머니와 통화를 할 때면 여전히 생각이 맞지 않은 부분이 있을 때도, 그저 ‘네’라는 말로 통화가 끝나길 기다릴 정도였다. 모든 게 무기력해진 것이다.
그런 상태로 2년을 보내니 감정이 오갈 곳이 없어 속에서 썩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이 상황에서 어떤 느낌이 들어야 해, 라고 수학 문제에 공식을 입력하듯 거기에 맞춰 행동할 때도 있었다. 『감정도 설계가 된다』라는 책을 읽어야겠다고 선택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서문을 읽자마자 공책 한 권을 준비했다. 각 이야기 끝에 스스로 해볼 수 있는 간단한 연습 법이 있기 때문이다. 8페이지에 나오는 "이 책은 화를 없애는 방법을 다룬다"라는 말에서 벌써부터 기대가 한껏 올랐다.
내 마음이 소란스러운 이유
1장으로 들어서면서 책은 화의 스물네 가지 형태에 대해 말해준다. 직접적인 화, 위선, 도둑질, 거짓말과 기만, 우울증, 고립, 수동 공격, 절망, 자살, 번아웃, 자기 방해, 낮은 자존감, 강박행동, 강박관념, 복수심, 중독, 심신증, 예기불안, 마조히즘, 사디즘 등이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여겨봤던 형태는 '중독'이었다.
중독된 사람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대상에 대한 생각, 즉 또 다른 자극의 추구밖에 없다. 시야는 좁아지고 집중력은 약해지며 인생의 다양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렇게 중독은 우리를 위로한다. 하나의 대상만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원치 않았던 경험과 고통스러운 감정에 무감각해진다. 중독은 고통과 불안에서 우리를 방어하는 기능을 한다.
- 『감정도 설계가 된다』 p.40
책에는 "우리는 종종 분노를 잠재우고 감정을 마비시키기 위해 다양한 물질에 중독되곤 한다"고 나와있다. 그 문장에 나는 스스로한테 '일 중독'이 있단 걸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몸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으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만 해도 학교 근로, 아르바이트, 학원, 대외활동, 소모임 등 여러 일을 하고 있다. 잠시라도 쉬고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여러 생각이 겹쳐졌다. 짜증이 나거나 우울해지기도 하는 등 '화'가 다양한 형태로 휘몰아쳤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 그런 감정이 들지 않게 억지로라도 몸을 혹사시켰다.
1장에 나와있는 화의 스물네가지 형태를 읽어보고 한 번 자신은 어떤 형태인지 확인해보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다. 꼭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나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길 바란다.
감정 설계
2장은 '나'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을 샅샅이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2장의 첫 부분을 펼치자마자 놀랐는데, '상처받지 않으려고 선을 긋는다'라는 세부 제목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를 파괴하는 원한의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 『감정도 설계가 된다』 p.72
상처받지 않으려고 선을 긋는다, 내가 창피당하지 않으려고 남에게 창피를 준다, 우울증은 무너진 마음을 회복하라는 신호다 등. 2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뜨끔할 것이다. 마치 누군가 내 속내를 훑어본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껏 생각으로만 가늠하고 정의 내리지 못했던 마음을 정의 내려준 느낌이 드는 장이다.
3장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고 고요함을 되찾는 법을 말해준다.
다른 사람의 어떤 점을 용납할 수 없다는 말에는, 자신의 삶에서도 그런 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 『감정도 설계가 된다』 p.174
3장을 읽으면서 나는 가족 간에 분노와 갈등이 발생하는 주원인이 구성원 각자가 상호의존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아주 당연한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 당연한 걸 지금껏 간과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각자에게 개성이 있는데. 대체 언제부터 어머니와 의견이 다르다는 생각이 어느새 틀리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벌써부터 포기하는 마음을 가졌던 걸까.
이 책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책처럼 위로의 말을 건네진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라는 식의 이론을 알려준다. 자신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마음이 소란스러운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화를 다스리기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