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고독을 응시했을 때,
최승자(1981)는 “짓밟히며 짓밟히며”(p.58)올곧게 응시한다. 이 과정은 그녀를 무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마냥 우울하고 무기력한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열심히 빨아 널고 있”(p.19)는 행위를 통해 이것을 보편적인 일로 확장한다.”우리의 손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찾”(p.16)으며 사랑을 하다가도 “나를 잠가 놓고 떠”(p.38)난 ‘널 버리고 싶’(p.38)기도 하다.
다들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잘해주던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외로움을 장전”(p.66)하거나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빈 벌판을 헤”(p.36)매기도 한다. 이렇듯 최승자의 사랑은 영원한 행복이 아닌 “집과 거리와 나무들이 소리 없이 흔들리며 세상을 향한 울음의 통로를 만.”(p.76)들고 그녀의 “늑골도 하염없이 깊어”(p.76)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이 감정에 체념하지 않고 이를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를 보인다.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p.36) “내 속에서 커가는 이 치명적인 꿈을 아주 똑똑히”(p.76)본다.
밀물과 썰물처럼 최승자는 고독감에 잠겼다가 그것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최승자로 하여금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중략)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p.13)라는 자기인식을 하게 만든다. 이 인식은 “긴 몸뚱어리의 슬픔”(p.82), 더 나아가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p.82)으로 확장된다. ‘아무 것도 아’닌 최승자는 감정의 충돌을 포용한다.
상대가 나를 외롭게 만드는 것을 견디라는 뜻이 아니다. 상대에게 매몰되지 않고 나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연인 사이는 24시간 켜져 있는 간판처럼 끊임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날 때마다 전류가 흘러야 하고, 새로워야 한다고 그렇게 믿었다.
나는 이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승자의 시집처럼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때, 내 안의 고독을 직시할 때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사랑은 고독감에서 출발한다. 고독감을 통해 우리는 불필요한 정보들을 정리할 수 있다. 같은 사진이 수십 수백 장 저장된 우리의 핸드폰 갤러리처럼, 마음은 내가 쌓아놓은 상대의 이미지와 불안감으로 가득하다.
고독함을 즐길 수 있을 때 버려야 할 것이 보이고, 여백이 생긴다. 여백은 상대의 새로운 면을 품을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상대를 깊이있게 본다. 고독과 사랑은 분리할 수 없다. 고독의 맛과 사랑의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