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통일

글 입력 2014.03.0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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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정식 메인.JPG
이정식 메인.JPG


<우리의 소원>은 우리 민요 <아리랑>과 더불어 남북한 주민들이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노래 중의 하나이다. 우리 교과서에 실린 것이어서 남한에서만 오랫동안 불려지다가 1989년 임수경씨가 북한을 방문해 부른 이후 북한에까지 널리 퍼졌다. 임수경씨는 당시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전국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전대협)의 대표자격으로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에 참석했다가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서 돌아왔다. 곧바로 구속되어 3년여 옥고를 치렀다. 북한에서는 임수경씨를 ‘통일의 꽃’이라고 불렀다. 이 노래는 원래 1절뿐이다. 안병원 선생은, 북한에서는 이 노래의 주제를 2절은 ‘평화’로 3절은 ‘자주’로 바꿔 부르더라고 했다(필자는 2011년 10월과 11월 두차례에 걸쳐 안병원 선생을 만났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때 우리 측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6.15 남북 공동선언에 서명한 후 수행원들과 손을 잡고 함께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 통일에 대해 최고의 상징성을 가진 노래가 된 것이다.


◆<우리의 소원> 노래비를 찾아서

필자는 2011년 10월 20일 <우리의 소원> 노래비가 있다는 경기도 이천의 청강문화산업대학을 찾아갔다. 정문에는 드나드는 차들을 통제하기 위한 차단기가 내려져있었다. 차가 그 앞에 서자 경비원은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차단기를 올려주었다. 단풍이 반쯤 물든 아담한 교정에서는 가을 냄새가 물씬 났다. 노래비를 찾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를 주차한 곳이 마침 본관 앞길이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다 보니 노래비는 바로 본관 앞 오른쪽 정원 안에 있었다. 남북 분단을 상징한다는 쪼개진 화강암 위에 검은색 노래비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악보와 가사가 함께 새겨져있었다. 안병원 선생의 친필 악보다. 그런데 읽다보니 3행의 가사가 교과서의 가사와 조금 달랐다. 어떻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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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비의 가사는 초기의 것
<우리의 소원> 노래비는 2006년 5월 10일 청강문화산업대학 개교 1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세워졌다. 노래비 제막식에는 안병원 선생이 캐나다에서 귀국해 참석했다. 노래비를 만들면서 학교 측은 안병원 선생에게 친필로 악보와 가사를 써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안 선생의 친필 악보가 노래비에 새겨지게 되었다. 안 선생은 이때 보낸 악보에 초기의 가사를 써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노래비 3행의 일부(‘이 나라 찾는데 통일’)가 지금의 가사 (‘이 나라 살리는 통일’)와 조금 다른 이유이다. 안 선생은 필자에게 “교과서에 실려있는 것이 현재의 가사로서 맞는 것이고, 노래비의 가사는 초기의 것”이라고 말했다. 노래 가사도 세월의 흐름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경우가 많다. 1947년 삼일절 특집 노래극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던 <우리의 소원은 독립>의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
이 목숨 바쳐서 독립
독립이여 오라
이 겨레 살리는 독립
이 나라 찾는데 독립
독립이여 어서 오라
독립이여 오라
(출처: <음악으로 겨레를 울리다>, 안병원 지음, 도서출판 삶과꿈, 2006)




이 대학에 <우리의 소원>노래비가 세워지게 된 것은 학교에 만화과가 있어 우리나라 신문 만화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안석주 선생의 신문삽화 등을 교재로 쓰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학교 측에서는 안석주 선생이 삽화가이면서 유명한 <우리의 소원> 작사자이기도 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개교 10주년에 맞춰 노래비 건립을 추진했다. 노래비 건립과 관련하여 일부 기사에 ‘이 대학 설립자인 청강 이연호 선생과 안석주 선생이 친구인 점 등 여러 가지 인연에 따른 것’이라고도 되어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안병원 선생은 밝혔다. 두 분이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안 선생은 노래비 제막식 때도 참석자들이 함께 부른 <우리의 소원>을 지휘했다. <우리의 소원>은 이곳에 세워진 노래비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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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삽화계의 선구자 안석주

검은 돌로 된 노래비의 앞면에는 악보와 가사가, 옆면에는 “<우리의 소원> 노랫말을 쓴 안석주의 아들 작곡가 안병원의 청원으로 청강 10주년 개교기념일에 이 노래비를 세우다” 라고 새겨져 있었다. 뒷면에는 작사 작곡자를 소개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다소 중복되지만 비에 새겨진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석영 안석주(서울 1901.10.10∼1950.02.24)는 1921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신문소설의 삽화를 그려 우리나라 삽화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일본 동경 미술학교를 마친 그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만문(漫文) 만화시대를 개척했다. 해방 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삼일절 기념 특집 어린이 노래극 대본을 부탁받아 <우리의 소원은 독립>의 노랫말을 쓰고 이것을 당시 서울음대학생이던 아들 안병원이 작곡하였다. 남북이 갈라지면서 노랫말은 독립이란 말 대신 통일로 바뀌었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남북 칠천만이 함께 부르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이천육년 오월 진성 이동렬 짓고 쓰다”

여기서 말하는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신문소설이란 나도향의 <환희>인데 이 소설의 삽화를 안석주 선생이 그렸다. 그는 1916년 휘문고등보통학교 다닐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졸업 후 모교인 휘문고보의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며 이때부터 신문소설의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924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한 뒤 이듬해 귀국하여 동아일보 학예부장이 되었다가 몇 년 후 조선일보로 옮겼다. 그는 1934년 자신이 쓴 소설 <춘풍>이 박기채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노래비의 작사자 소개글 중에 ‘만문 만화’란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나온다. ‘만문 만화’란 한 컷의 삽화 옆에 간단한 설명을 붙인 다음과 같은 형태의 만화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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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1절 목천 독립기념관 표정 6컷

이날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서는 3.1절 93주년을 기념하여 3.1만세운동 재현행사, 나라사랑 걷기대회, 서예가 김동욱 선생의 서예 퍼포먼스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출처-음악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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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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