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김다솔 피아노 리사이틀, 신비로운 밤의 가스파르

봄, 시 그리고 피아니스트.
글 입력 2017.04.19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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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클래식 데이트 바로 다음 날, 같은 장소인 티엘아이 아트센터에서 관람했던 김다솔 피아노 리사이틀입니다. 이틀 연속으로 성남을 왕복하다 보니 체력적으론 조금 힘들었지만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다녀왔습니다. 무엇보다 지금껏 질 높은 클래식 연주를 접해볼 기회나 마땅한 동기가 없었는데, 이번 문화 초대를 통해 처음으로 클래식의 매력에 발을 담글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좋은 클래식 공연장을 알게 된 것까지도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멋진 연주를 펼쳐주셨던 김다솔 피아니스트는 만 11세의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하여 부산예고에 입학했으며, 만 16세에는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에 입학했습니다. 임종필 교수, 게랄드 파우트, 카를하인츠 캠멀링을 거쳐 현재는 아리에 베르디를 사사하고 있습니다. 2005년 일본 나고야 국제음악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2011년 프랑스 에피날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였고, 2008 슈만 국제 음악 콩쿠르, 2008 제네바 국제 콩쿠르, 2010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2011 뮌헨ARD 국제 음악콩쿠르, 2012 스위스게자안다국제콩쿠르 등 많은 콩쿠르에서 입상하였습니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과도 수많은 협연을 가졌으며, 2015년에는 첫 도이치그라모폰 데뷔 앨범을 발매하고 독주회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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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시를 연주하다.
몽환적인 산문시가 공연장 가득 울려퍼지는 90분."


90분간의 공연이 끝난 후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당황스러움'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들은 어떻게 저런 곡들을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이토록 아름답게 연주해낼 수 있는 걸까.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아닐까. 기껏해야 가끔 유튜브에서 영상들만 찾아보다가, 처음으로 열정을 담은 연주를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되니 사뭇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알 수도 없을 그 무던한 연습량과 삶을 바친 노력이 열 손가락 끝에서 그려지는 모습. 오직 하나만을 바라보고 걸어온 그 길을, 피아노가 직접 나서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로 보답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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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신비로운 새벽의 호수처럼 - 물의 요정 (Ondine)


모든 연주가 아름다웠습니다. 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1부에서 연주되었던 '밤의 가스파르'라는 곡이었습니다. 지금껏 알고 있었던 유명한 클래식 음악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분위기. 물 흐르듯 멜로디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저는 신비로운 환상 속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유려하게 춤추는 손가락은 열 명의 무용수와 같았습니다. 새벽의 푸른 안개가 내려앉은 호수 아래 그들은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어깨부터 손끝까지 잔잔한 물결이 휘감던 움직임에는 곧 날개가 돋아 수면 위로 화려하게 날아올랐습니다. 온 사방에 흩뿌려진 물방울들은, 새벽의 베일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빛을 받아 무지개처럼 반짝였습니다. 몽환적인 광경이었습니다. 이번 리사이틀 보도자료 속 '물이 튀고 요정이 날아오르는 환상을 느낄 만큼, 묘사력이 극한에 다다른 걸작 속으로 관객을 안내할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어떤 곡을 나타내고 있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제1곡, '물의 요정' 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밤의 가스파르를 다시 한 번 들어보며 그 신비로운 곡에 대한 이야기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밤의 가스파르는 알로이지우스 베르트랑의 몽환적 산문시집 '밤의 가스파르'에서 영감을 받은 라벨이 시 세 편을 토대로 작곡한 모음곡이라고 합니다. 라벨로 하여금 환상적인 악상을 떠올리게 한 시 세 편의 제목은 물의 요정(Ondine), 교수대, 스카르보입니다. 모음곡 밤의 가스파르 중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졌던 제1곡, '물의 요정'의 번역을 올립니다.


“들어봐요, 들어봐요! 부드러운 달빛에 비친 당신의 유리창에 물방울을 흩뿌려 울리게 하는 것은, 나 물의 요정이랍니다. 그리고 여기 무지갯빛 가운을 걸친 저택의 아가씨가 발코니에 서서 별이 총총한 밤의 아름다움과 잠든 호수를 바라보고 있어요. 흐름을 헤엄치는 물방을 하나 하나가 물의 요정이고, 흐름의 하나하나가 나의 거처로 가는 오솔길이며, 그리고 나의 거처는 깊은 호수 아래 불과 흙과 공기의 세모꼴 속에 물로 만들어져 있죠. 들어봐요, 들어봐요! 나의 아버지는 푸른 버드나무 가지로 물가를 찰랑거리고 계시죠. 그리고 나의 자매들은 그 물거품의 팔로 물백합과 글라디올러스가 우거진 푸른 풀의 섬을 쓰다듬고, 강물에서 구부정하게 수염을 드리운 채 낚시하는 버드나무를 놀려대지요.”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나에게 애원했다. 자신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물의 요정의 부군이 되라고. 이리로 와서 호수의 왕이 되라고. 그러나 나는 인간 여성을 사랑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투정 부리며 나지막하게 울었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소리 내어 웃더니, 물방울이 되어 나의 푸르스름한 창문을 타고 하얗게 흘러내려서는 이내 흩어져버렸다.



익살스러운 악마의 장난 - 스카르보 (Scarbo)


피아노의 대가들도 어려워할 만큼 고도의 연주 기교를 요구한다는 밤의 가스파르. 그 중에서도 특히 제3곡, '스카르보'는 눈앞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것이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처럼 느껴질 만큼 화려하고 복잡한 곡이었습니다. 무대 위 김다솔 피아니스트의 열 손가락은 무용수의 자태를 넘어서 마치 이 곡의 주인공인 악마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연상시킬 만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 몇 번이나 나는 스카르보를 보고 들었던가. 황금빛 꿀벌로 얼룩진 남색 깃발 위, 은화처럼 밝은 달이 떠오른 한밤중에! 몇 번이나 나는 들었던가, 내 침대를 둘러싼 실크 커튼 속에서 긁어대는 듯 울려 퍼지는 그의 웃음소리를. 몇 번이나 나는 보았던가, 천정에서 떨어져서 손을 놓은 마녀의 빗자루처럼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모습을.
드디어 그가 사라지는가 하고 생각하자마자, 그는 대성당의 첨탑처럼 커지고 또 커져서 달빛을 가리고 그의 뾰족한 모자에서는 금종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의 몸은 푸르게 변하여 마치 촛농처럼 투명해졌다. 그의 얼굴은 꺼져가는 양초처럼 창백해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원작인 알로이지우스 베르트랑의 시를 읽고 다시 한 번 밤의 가스파르를 들어보며 새삼 라벨이 얼마나 뛰어난 작곡가였는지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문자가 아닌 무형의 음악이라는 매개체에 이토록 시적이면서도 세세한 묘사를 담아낼 수 있다니. 짧은 서사가 포함된 산문시이기 때문에 분위기의 적절한 변화도 중요한데, 라벨은 밤의 가스파르를 통해 '분위기의 변화' 또는 분위기의 이미지화' 를 넘어서 시를 통째로 영상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다솔 피아니스트는 하나의 영상과도 같은 이 곡을 무대 위에서 마치 영사기처럼 훌륭하게 재현했습니다. 대부분의 뮤지컬에서 그 어떤 넘버보다 주인공 한 명의 아리아가 수많은 관객들을 압도하는 힘을 지녔듯이, 한 사람과 피아노 한 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그 근원지의 작은 규모가 무색할 만큼 강렬했습니다. 잔잔하거나 편안하기만 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클래식이 이런 분위기와 에너지를 가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색다르면서도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공연명     김다솔 피아노 리사이틀 “봄, 시 그리고 피아니스트”
일시        2017년 4월 7일 (금) 20:00 
장소        성남 티엘아이 아트센터
티켓        전석 30,000원  (조기예매 할인 20%)
주최        티엘아이 아트센터
공연시간   90분 
관람연령   초등학생 이상
공연예매   인터파크 1544-1555 예스24티켓 1544-6399 
문 의        031) 779-1500 



[김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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