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문학]

글 입력 2017.02.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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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누구든지 어떤 일을 하면서,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다. 특히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할 때, ‘이렇게 해도 되나?’ 혹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대개 생각으로 그치곤 한다. 머릿속에서 멈춰버린 의문은 애써 구겨지고 지워진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야.’ 라고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사실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하달된 것에 반발하기란 쉽지 않다. 만약 그랬다가 ‘나’에게 어떤 봉변이라도 닥칠까봐 두렵고, 당장 ‘내’가 먹고 살기 바쁜 세상이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뉴스를 보는 것보다는 당장 스펙 하나라도 더 쌓는 것이 중요하고, 영어 점수를 1점이라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나이 드신 몇몇 분들은 요즘 젊은 애들은 사회에 관심이 없다고 혀를 차시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나쁜 것일까? 당장 내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가치를 미뤄두는 게 잘못일까?

 오늘 소개할 작품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은 바로 그런 의문을 내포하고 있다. 이 책은 한 평생을 ‘집사’라는 직업의 가치에 충실하며 살아온 주인공 스티븐스가, 젊은 시절 어긋나버린 자신의 사랑과 잘못된 선택으로 망가져버린 자신의 주인을 회고하며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여정을 담담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2. 가즈오 이시구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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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즈오 이시구로 >


 오늘 소개할 책의 저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면, 당연히 그가 일본작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영국작가이다. 물론 양친이 일본인이지만, 그는 6세에 영국으로 이민을 와서 그 뒤로 쭉 영국에서 살았다. 비록 그의 작품 중 몇몇 작품은 일본을 배경으로 하거나 일본인 등장인물을 내세우고 있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지금도 이시구로는 현대 영국소설 작가로 분류된다. 그 중에서도  『남아있는 나날』은 세계 3대 문학상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의 특징은 바로 '믿을 수 없는 주인공', 그리고 '회상'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전개되며, 주인공의 독백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독자는 주인공의 말을 결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한 뒤 많은 문학 작품에서 쓰이고 있는 기법으로, 독자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위화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그 위화감 속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절대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을 숨겨진 생각들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된다. 마치 '조선왕조실록'처럼, 그것이 분명 사관의 시점에서 쓰인 글이기에 실제와 다른 것이 있더라도 현대에 그것을 읽는 우리가 그때 실제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유추하고 추측할 수 있듯이 말이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는 과거에 대한 회고가 자주 등장한다. 현재에 진행되는 사건과 맞물려 진행되는 회상은 주인공이 살아온 삶을 조금은 쓸쓸한 분위기로 묘사해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독자는 결국 주인공이 그토록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엄청난 반전이 있거나, 혹은 독자를 기절초풍하게 만드는 서사는 아니지만 마치 물에 퍼지는 물감처럼 조금씩 퍼지다가 마침내 책을 읽던 독자의 마음을 온통 물들이고 만다.



3. 『남아있는 나날』의 배경과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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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있는 나날』의 영어판 표지 >


 『남아있는 나날』은 1900년대 초중반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가지 시간축을 가지고 진행된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회고하는 과거와 그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는 오직 하나, 스티븐스가 여전히 헌신적인 집사라는 점만 빼고는 무척이나 다르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노인 스티븐스는 쇠퇴한 대영제국의 유산으로, 미국 출신 사업가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처지이다. 

 화려한 저택의 부속품처럼 하루하루를 지내던 스티븐스는, 어느 날 처음으로 휴가를 받게 되고 과거에 자신과 함께 저택에서 일했었던 켄튼 양을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는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켄튼 양을 만나러 가는 이유를 저택에서 살림을 돕는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묘사하지만, 뒤이어 등장하는 그의 과거 회상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켄튼 양에게 가지고 있던 특별한 감정을 눈치챌 수 있게 된다. 

 과거, 스티븐스는 화려하고 막강한 대영제국의 귀족인 달링턴 경을 모시는 집사였다. 그는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직업에 요구되는 '위엄'이라는 가치를 지켜내어 진정으로 위대한 집사가 되고자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달링턴 경을 모시면서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의 저택에 찾아오는 세계의 권력자들을 자주 접하고, 그들의 신임을 받고,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를 모두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것에 의식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저런 엘리트들이 있어야 하며, 자신은 저런 엘리트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돕는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집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일을 우선시 하며, 짝사랑하던 켄튼 양이 저택을 떠나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것이 집사로서 '올바른'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티븐스의 주인 달링턴 경은 온화하고, 사려깊으며 인류애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진짜배기 '영국신사'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달링턴 경의 행동거지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세계 정세에서는 너무나도 '순진한' 것이었고, 이는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던 스티븐스에게까지 파국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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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 것을 결정한 베르사유 조약 >


 달링턴 경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대한 세계 각국의 압박(특히, 어마어마한 배상금 문제)으로 절친했던 독일 대사가 자살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연합국이 패자인 독일에게 지나치게 잔인한 처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독일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이런 신념 하에 연합국의 여러 유력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승자의 입장에서 독일에게 너그러이 인류애를 실현해 줄 것을 호소한다. 이런 노력은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연합국은 독일에 대한 압박을 사실상 중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히틀러가 나치즘을 앞세워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끔찍한 일을 벌이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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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 식 경례를 하는 히틀러 >


 독일에 대한 연민은 어느 순간 달링턴 경을 집어 삼켜, 그가 올바른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심지어 그는 나치즘과 유사한 사상을 주장하던 이들에게 동조하여, 집안에 있던 유대인 하녀 둘을 내보내라는 명령을 하기에 이른다. 집사인 스티븐스는 이 결정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아무 죄도 없는 하녀들을 쫓아낸다. 심지어 하녀들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스티븐스가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던 켄튼 양이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데도, 스티븐스는 그것이 주인인 달링턴 경의 결정이므로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소설 속에는 이처럼 나치에 대한, 혹은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우리는 오늘날 그들을 인간 이하의 사람도 아니라며 비난하지만, 사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들의 자신의 직업적인 성취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온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미쳤다거나, 혹은 살인을 즐기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라서 유대인들 몇 만 명이 죽는 것을 방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승진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였을 것이고,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는 평을 듣기 위해서 그들을 박해했을 것이다. 혹은 아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렇게 시키기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맞다고 여겼을 것이다. 마치 스티븐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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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전범들을 대상으로 한 뉘른베르크 재판,
 대부분의 전범들이 혐의를 부인하거나 불가피한 일이었다며 항변했다 >


 그리고 또한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성취를 위해서 우리가 객관적인 가치판단을 보류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삼성에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 중의 대다수는 삼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티븐스 역시 자신의 집사로서의 ‘위엄’을 위해서라면 자신 개인의 존재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사람이다. 우리는 때로 얼마나 바보 같아지고 또 잔인해지는가. 스티븐스의 행동은 그것이 충분히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소름끼친다.



4. 마치며

 소설의 결말부에서 스티븐스는 결국 켄튼 양이 자신처럼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는 자신의 추측이 틀렸음을 인정하게 된다. 비록 두 사람 사이의 어긋나버린 사랑 이후에 켄튼 양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현재를 당당히 살아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스티븐스는, 노인이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과거의 영광 속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켄튼 양과의 마지막 인사 이후, 스티븐스는 한참 동안 석양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자신의 본분인 집사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린다.  평생을 잘못된 신념을 위해서 살아왔더라 하더라도, 그것이 스스로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줄지라도, 심지어는 그것을 이제 더는 돌이킬 수조차 없음을 알아버렸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남아있는 나날’들이 존재한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고, 그게 언제든 자신이 갇혀있던 아집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가진다. 거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내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로부터 남아있는 나날동안 발걸음을 돌려 올바른 길을 찾으려 노력하면 된다. 

 진정으로 ‘더 나은 세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비록 그 노력이 결국은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가 걸어간 궤적은 남아 그가 진정한 존엄을 가진 인간임을 증명하리라.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인간적인 ‘희망’의 본 모습인 것이다.


[최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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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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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큰 위로와 희망을 얻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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