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카프카의 『변신』: 누가 벌레인가? [문학]

글 입력 2016.11.11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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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고르 잠자는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한 빚과 가족의 생계비용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잠자는 일하고 또 일하고, 그런 뒤에는 가족에게 돈을 준다. 그들은 그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마침내 그가 ‘변신’한다. 흉측한 벌레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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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이렇게 잠자가 아침에 눈을 떠 벌레로 ‘변신’한 상황에서 시작된다. 벌레가 된 잠자는 일하지 못한다. 벌레가 된 그의 걱정은 변한 자신의 처지가 아닌 자신 없이 가정을 꾸려야 할 가족이다. 자신이 돈을 벌지 못하니 누가 돈을 벌고, 어떻게 생활할지 잠자는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 잠자의 걱정과는 달리 가족들은 모두 제 몫의 생활수단을 갖는다. 그런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리고 잠자는 잊혀져 간다. 벌레가 되었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이름 속에 끼어들 수 없다. 그렇게 그는 동생의 비수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죽음을 예견한 듯, 동생의 독설에도, 아버지가 던진 사과로 인해 곪은 상처에도 무감각하게 죽어갈 뿐이다.


그 돈을 집으로 가져와서 탁자 위에 늘어놓고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도 하고 기쁘게도 해 줬다. 그때는 정말 남부럽지 않을 만큼 가족 모두가 행복해했다. 그 후에도 그레고르는 온 가족의 생활비를 부담할 많은 돈을 벌었고 또 생계를 유지해 나갔지만, 식구들은 그때처럼 기뻐하거나 행복해하지는 않았다. 가족은 물론이고 그레고르 자신도 자신이 벌어 오는 돈으로 생활한다는 것에 익숙해져서 인지, 식구들은 고마워하기는 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돈을 받았고 그레고르도 기꺼이 돈을 내놓았다. 그러나 따스한 마음이 특별히 오고 간 적은 없었다.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변신』, 민음사



 카프카의 이러한 『변신』은 자칫 허무맹랑한 시작으로 독자들의 공감을 다소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책의 마지막에 이른다면 우리는 잠자의 모습이 어딘가 아주 익숙하다고 느낄 것이다. 어디서 본 듯한 이 감상은 책을 덮고 나서야 깨닫는다. 바로 가장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변신”이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다 보면 우리는 모두 이상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것은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가 단순한 소설 속 인물을 넘어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벌레로 변했다는 것만 제외시킨다면, 그의 하루와 그의 가족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생각해본다면, 벌레로 변한 것이 비단 잠자 일뿐일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벌레를 일종의 상징성으로 둔 채 책을 읽는다면, 결국 잠자는 자본주의에서 도태된 인간이자 가장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돈”을 벌지 못하는 가장을 외면하고, 잊으려 한다. 우리에게 짐이 된다는 이유로 그를 투명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제야 『변신』이라는 이야기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단순한 판타지라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사실 우리의 이야기라는 깨달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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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책을 덮고도 한참을 잠자의 죽음 앞에서 서성인다. 그의 가족들이 미래를 꿈꾸며 기차에 몸을 싣고 떠날 때도, 우리는 잠자의 죽음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마침내 우리는 잠자의 죽음을 통해 가정이라는 본질을, 나아가 인간존재라는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게 되면서 “변신”의 환상적 상징을 일상적 공간으로 이끌고 와 “너도 벌레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아아, 세상에! 나는 어쩌다 이런 고달픈 직업을 택했단 말인가!"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 『변신』, 민음사



 그레고르는 눈을 뜬 직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가 너무나 피곤해서 이러한 환각(벌레가 된 자신)을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일의 압박에 지쳐있다. 악마에게 이 모든 것을 다 가져가라며 말하는 부분에서는 그레고르가 견뎌내고 있는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책임감에서 도피하고 싶은 그의 욕망이 그를 벌레로 변신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중압감. 때때로 모든 책임을 버린 채 떠나고 싶은 마음과, 그럴 때마다 드는 죄책감. 이 복합적인 감정이 그를 괴롭히던 세계로부터 도피시킨 것이다.

 그레고르는 자아를 상실했다. 자신의 삶보다 가족의 안위를 우선시했다. 그의 삶 속에는 정작 그가 없었다. 그가 사라진 세계에는 균열이 일어났다. 균열은 그를 변신시켰다. 그는 변신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진짜 자신의 삶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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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가 된 인간. 과연 그 속에는 자아가 있을까? 누가 보아도 흉측한 벌레인 겉모습과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인간이라는 존재. 이 묘한 존재는 벌레이지만 벌레가 아니고 인간인 동시에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는 본인을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지하지만 정작 그의 가족은 그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상실은 점차 서서히, 그러나 거대하게 그를 삼킨다. 만약 세상에 온통 나무의 모습을 한 존재들이 있고, 그 사이에 유일하게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본질은 같아도 그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자 이질감이 드는 인정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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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도 뉴욕타임즈에는 카프카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가 실렸다. 그의 유고에 대해 이스라엘은 카프카가 유대인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은 독일어로 쓰여졌다는 이유를 근거로 들어 소유권을 주장했다. 어쩌면 작가인 카프카 역시 『변신』의 주인공 잠자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었을지 모른다.

 문예사조의 흐름을 계속해서 변해왔다. 환상소설이 주를 이루던 때도 있었고, 산업주의 시대의 이면을 폭로한 소설이 주를 이루던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과감하게 문학성을 탈피한 소설들도 있었다. 예컨대 최제훈 작가의 『퀴르발 남작의 성』이나 박형서 작가의 단편집인 『자정의 픽션』에 수록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가 그 예이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소설은 무엇으로 분류해야 할까? 그의 소설은 판타지라기에는 너무나 현실의 무게를 중시했고 알레고리적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흐름이 벌레로 변한 그를 너무나 직선적으로 보여줬다. 어쩌면 『변신』은 이방인의 연장선이 될지도 모른다. 작가인 카프카도, 그의 작품인 『변신』역시도 어디에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죽어도 작품은 죽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에 남아 작가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리고 있다. 『변신』은 누구도 될 수 없었던 고독한 작가의 유일한 소속이자 자신을 이해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변신』은 작가의 자전적 수기가 될 수도, 소설이 될 수도 있다. 고독한 음성이 그레고리 잠자를 부르지만 그는 깊은 수마에 빠져 카프카의 고독한 외침을 듣지 못할 것이다.

  잠자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본 글을 마친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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