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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영화 따라 걷기 ‘홍콩’ 편: 중경삼림, 화양연화 [여행]

90년대의 낭만을 간직한 홍콩에 다녀오다

by 최수경 에디터
2026.10.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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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때때로 가보지 않은 도시에 대한 기억을 우리 안에 먼저 만들어놓는다. 건물 사이로 번지는 불빛도, 수많은 사람이 스쳐 가는 거리의 소란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풍경처럼 느껴지는 곳. 내게는 홍콩이 그런 도시였다.

       

      좁은 복도에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던 장만옥과 양조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누군가의 창문을 바라보던 페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달리던 금성무.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 홍콩은 늘 빽빽하고 어수선했지만 그 혼잡함마저 이상하리만큼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홍콩으로 떠났다. 익숙한 장면이 태어난 풍경을 직접 걸어보기 위해.

       

       

       

      《중경삼림》 촬영지, 에스컬레이터와 청킹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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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에서 가장 먼저 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낀 곳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센트럴과 미드레벨 지역을 잇는 긴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자 《중경삼림》에서 페이가 이곳을 지나며 경찰 663의 집을 바라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 역시 옆으로 스쳐 가는 건물의 창문들을 괜히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 중 어딘가에 양조위가 살던 그 집이 있으려나 하면서.

       

      침사추이에서는 영화의 또 다른 주요 배경인 청킹맨션을 찾았다. 좁고 복잡한 공간 안팎으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고, 건물 앞 거리 역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뒤엉켜 있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청킹맨션 앞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뒤엉키는 군중을 마주하자 《중경삼림》 속 청춘들의 어지러운 시간이 도시의 풍경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며 이별을 유예하는 경찰 223과 떠난 연인의 흔적 속에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찰 663. 그들의 마음은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데도 주변의 시간과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간다. 왕가위는 그렇게 사랑 앞에서 방향을 잃은 청춘의 마음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홍콩이라는 도시의 풍경 속에 겹쳐놓고 있었구나.

       

       

       

      《화양연화》의 낭만이 담긴, 건축물과 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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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의 둘째 날에는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의 촬영지로 알려진 익청빌딩을 찾았다. 사방에는 창문과 베란다, 에어컨 실외기가 빼곡하게 붙어있었고 맞은편 집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수많은 사람의 생활이 겹겹이 포개진 듯한 풍경 앞에서 내게 정작 떠오른 작품은 《화양연화》였다.

       

      처음 《화양연화》를 보았을 때는 여러 사람이 가까이 모여 살고, 좁은 복도와 계단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모습이 꽤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알고 이웃의 방을 오가는 모습 역시 영화 속 독특한 배경이라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빽빽하게 맞붙은 집들을 직접 바라보고 나니, 그것이 영화가 만들어낸 장치가 아니라 실제 그들이 살아온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행 중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도 《화양연화》는 찾아왔다. 하루 종일 걸어 체력이 바닥난 어느 밤, 버스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빨간 문을 열고 앉아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좁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던 첸 부인과 차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두운 좌석에 나란히 앉아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로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들을 각자 삼키고 있었으려나.

       

       

       

      여전히 영화는 이곳에, 큐브릭 서점과 스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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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의 끝무렵에는 큐브릭 서점을 찾았다. 독립·예술영화를 꾸준히 소개하고 여러 영화제가 열리는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 1층에 자리한 큐브릭은 《샤이닝》을 만든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공간이다. 온갖 영화와 예술에 관한 책을 펼쳐 들고 저마다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홍콩에서 영화는 과거의 영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현재 속에서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있어 괜시리 기뻤다.

       

      그날밤 찾은 스타의 거리에서도 같은 감각이 이어졌다. 빅토리아 하버 너머로 센트럴의 마천루가 펼쳐지는 거리의 초입에는 여신상이 서 있다. 홍콩 금상장 영화제의 트로피를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그 뒤로 눈부신 야경이 펼쳐지고, 거리에는 이 도시의 역사를 만들어온 수많은 이들의 핸드 프린팅 행렬이 이어졌다. 한때 스크린을 통해 동경했던 홍콩 영화의 시간과 지금 눈앞에서 쉼 없이 움직이는 도시가 한 풍경 안에 나란히 놓인 순간이었다. 오래된 영화의 흔적을 찾아 시작한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풍경을 없을 것 같다는 황홀감에 젖어 들었다.

       

      그렇게 3박 4일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도 확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영화가 홍콩을 그토록 낭만적으로 만든 것인가, 아니면 홍콩이라는 도시가 수많은 영화를 낭만적으로 만든 것인가.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필름 속에만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홍콩의 낭만은 여전히 거리의 빛과 사람들 사이에서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 영화로 사랑했던 도시를 이제는 나의 기억으로도 사랑할 수 있게 됨에 감사하며 짧은 여행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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