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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단편소설 〈씬짜오, 씬짜오〉는 ‘나’의 가족과 투이네 가족의 관계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배경으로 인해 어그러지는 과정을 다룬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의 땅에서 서로 의지했던 두 가족은 베트남전이라는 상흔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미묘한 틈을 만들어낸다.

 

이해할 수 없다면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상호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관계


 

 

‘너희 아빠와는 말이 통하지 않아.’ 엄마는 종종 내게 그렇게 말했다. 둘은 서로를 투명 인간처럼 대했다. 밥을 먹을 때도, 텔레비전을 볼 때도, 드라이브를 할 때도 그랬다. 그런 행동이 어린 나에게 어떤 상처를 줬는지 그들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은 아무렇지 않은 듯 깊은 속마음을 말하기도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투이 같은 어린애가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해서였다.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라는 마음이 그날 밤, 아줌마와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갈라놓았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 더는 다치고 싶지도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

 

 

모든 인간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고, 다른 경험을 통해 어른이 되었다. 국적도, 취향도, 모든 것이 다른 이들이 아무리 친밀해지더라도, 그들 사이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의 중심에 단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하는 관계가 존재한다.

 

‘나’의 가족과 투이네 가족이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같이 식사하더라도,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함께 만화책을 읽었더라도, 이들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해서 함께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서로의 배경이 같지 않았다. 베트남전이라는 공통된 전쟁을 겪었지만,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이는 가족 간의 친밀했던 관계를 깨부수는 요인이 되었다.

 

 

 

알면서도 외면한 사이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

 

 

누가 떠나고 남는 것인지 모호할 수밖에 없는 게 관계라고 생각한다. 관계란 둘 이상이 함께 존재해야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시간 속에서 언제나 ‘관계’에 대해 고민하던 아이였다. 서로를 경멸하는 부모 밑에서 영혼의 밑바닥부터 떨던 아이. 이는 먼 훗날의 내가 정의한 자신의 어린 시기다. 언제나 누군가가 떠나버릴까 두려워하던 소녀는 항상 하나가 떠나면 어그러지고 마는 관계에 대해 고심했다.

 

‘나’의 가족과 응웬 아줌마네 가족이 소중하게 다뤘던 관계는 베트남전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처로 인해 어그러진다. 사실, 이는 서로가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외면해 온 진실이었을 것이다.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선택한 것은, 모순되게도 서로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이해 없는 애정


 

 

...나는 엄마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던 응웬 아줌마를 떠올렸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어릴 적부터 예민하고 우울하다는 소리를 들어 온 '나'의 엄마는 화자가 30대가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한 엄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사람 속에는 분명 화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응웬 아줌마가 엄마를 칭찬할 때 비로소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가끔 말을 들어주는 친구, 아주 조금이라도 곁을 줄 정도의 사람이 될 걸 그랬다는 ‘나’의 후회. 이 두 부류의 인간은 완전한 이해 없이도 서로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존재들이다. 사람의 관계에서 이해가 필수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 끝에, ‘나’는 엄마 또한 모두가 떠나버려 이미 혼자가 되어버린 아이로 인식하는지도 모른다. 그녀 또한 사람들 곁에서 끝내 이해받지 못한 채 외로웠던 존재이니 말이다.

 

항상 어리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나’의 말을 들어줬던 투이. ‘나’의 엄마의 모든 것을 분명 아름답다고만 여기지 않았겠지만, 그녀를 항상 예쁘게 바라봐줬던 응웬 아줌마. 항상 모두가 서로를 오해하고 동시에 애정한다.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다 해도, 그 엉킴은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외면이 오히려 관계를 지속해 주기도 하기에.

 

 

 

다른 말은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세상에는 이해 없는 애정이 존재한다.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곁에 남는 것. 그것은 하나의 ‘인정’에서 비롯할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싶은 부분은 철저히 외면하고 잊고 싶은 것은 끝내 치워버릴지라도, 결국엔 돌아볼 수밖에 없는 아픔이 있다. 그 고통을 끝내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정이다.

 

이 지점에서 의미하는 인정은 상대방을 다 이해한다는 오만이 아니다. 자신이 상대방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인정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여전히 너의 곁에 존재하겠다는 하나의 고백과도 같다.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 그 상심을 다시 꺼낼 필요는 없다.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더는 다치고 싶지도 않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니 말이다. 그저 그러한 관계를 다시 마주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새롭게 다시 인사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엄마를 빼닮은 모습으로 응웬 아줌마를 마주하는 '나'처럼.


 

씬짜오, 씬짜오. 우리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반복한다. 다른 말은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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