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발레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했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본 발레 공연은 어릴 때 본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발레를 좋아한다고 서슴없이 말할 만큼 그때 봤던 <호두까기 인형>은 환상적이었다. 판타지적인 이야기와 화려한 투투,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안무.
이제 나의 발레 세계가 좀 더 넓어졌다. 성동구 소월아트홀에서 만난 M발레단의 공연 덕분에 문학으로만 접했던 <돈키호테>를 무대 위에서 만났고, 발레계의 대작이라 불리는 <라 바야데르>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발레 음악의 역사에서 거장으로 꼽히는 루드비히 민쿠스는 ‘현대 발레의 아버지’ 마리우스 프티파와 수십 년간 협업하며 클래식 발레의 표준을 세웠고, <돈키호테>와 <라 바야데르>가 그 대표작이다.
민쿠스의 음악은 리듬이 매우 명확하고 규칙적이라, 무용수들이 고난도의 테크닉을 선보일 때 박자를 놓치지 않게 도와주는 ‘춤추기에 훌륭한 음악’이라고 한다. 그만큼 관객에게도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로 축제, 비극, 환상 등 극의 상황을 즉각적으로 이해시켰다.
발레 시놉시스 소개
돈키호테 | 세기딜리아, 투우사들의 춤, 스페인의 정취와 정열이 가득한 춤의 무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광장에서는 청년들과 투우사의 흥겨운 춤이 한창이다. 가난한 이발사 바질리오의 익살스러운 친구 무사초는 바질리오의 연인 키트리아를 돈만 많고 멍청하기만 한 가마쉬에게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러던 중, 중세소설에 빠져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찾아 여정을 떠난 돈키호테가 광장에 나타난다. 키트리아를 본 돈키호테는 그녀를 둘시네아로 오해하며 그녀에게 반하게 된다.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로맨티스트 돈키호테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키트리아와 바질리오는 가마쉬에게서 벗어나고 즐거운 춤을 추며 모두 하나가 된다.
라 바야데르 | 인도의 아름다운 사원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배신의 드라마
인도의 한 사원. 아름다운 무희 니키아와 연인 솔로르는 서로 사랑을 맹세한다. 그러나 솔로르와 공주 감자티의 결혼이 공표되며 화려한 결혼식이 열린다. 이들의 결혼을 바라보는 니키아는 슬픔을 감출 수 없다. 니키아를 죽이려는 감자티의 계략인 꽃바구니가 전해지고, 숨겨져 있던 독사에 물려 니키아는 결국 죽게 된다. 연인을 잃은 솔로르는 절망에 빠져 망령의 세계로 빠져들고, 니키아의 환영들로 가득 찬 망령의 왕국에서 둘은 영원한 사랑을 이룬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연은 <라 바야데르>다. 1막 돈키호테는 서사가 조금 심심하다고 느껴졌는데, 라 바야데르는 사랑, 질투, 복수와 같은 원초적인 테마의 공연이어서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을 사랑하다 해바라기가 되어버리고 만 클리티에의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또한 앵무새춤, 북춤, 물동이춤 등 다양한 캐릭터 댄스와 정교한 군무가 새롭고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가장 압도적이었던 순간은 <라 바야데르> 2막의 ‘발레 블랑(백색 발레)’이었다. 정교한 테크닉으로 무장한 수십 명의 무용수가 칼같이 대형을 맞추는 모습은 초현실적이었다. 무용수의 실루엣을 강조하는 조명을 보며, 옛사람들이 왜 발레에 그토록 열광했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 발레는 지금의 블록버스터 영화와 같은 완벽한 탈출구였으리라.
사진: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를 맡은 최솔지 발레리나
모든 공연이 끝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발레리나가 너무도 아름답다’였다. 신체 조건의 차이를 예술적 도구로 삼아 극적인 조화를 만들어내는 발레만의 매력을 여실히 느꼈다. 여성 무용수(발레리나)는 '가벼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반면 남성 무용수(발레리노)는 발레리나와 같은 동작을 해도 ‘가벼움’이 아니라 ‘힘’과 ‘높이’로 쾌감을 주었다.
대비와 조화를 보여주는 2인무(Pas de Deux, 파드되)는 극에서 흐르는 긴박한 감정선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남성이 여성을 높이 들어 올리는 리프트 장면, 중심을 잡아주는 동작들은 남성적인 든든함과 여성적인 유연함이 결합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 것은 M발레단의 세심한 해설이다.
이태리말로 “잘한다, 좋다”를 의미하는 “브라보(Bravo)”를 외치는 에티켓을 배웠다. 이를테면 뮤지컬은 넘버가 끝나고 난 뒤 박수를 치지만, 발레는 무용수들이 고난도의 기교를 보여주면 공연 전체의 흐름과 관계없이 이러한 박수와 환호를 보낼 수 있다. 또한 1막 돈키호테가 끝난 후에는 발레단의 이창희 무용수가 나와 관객이 따라 할 수 있는 동작을 다시 재현하며, 모든 관객이 간단하게 춤을 추기도 했다.
클래식한 걸 즐기다 보면 가끔은 아주 오래전 사람들과 같은 지점에서 전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신기하고 즐겁다. 옛사람들에게 발레와 오페라는 그 시대만의 가장 큰 오락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열광했는지, 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발레만이 갖는 아주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에너지의 대비, 그리고 극적인 이야기가 인간 본연의 감정을 건드렸다. 또한 화려함을 한 번에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웠던 때, 수십 명의 무용수가 칼같이 대형을 맞추는 군무와 박자에 맞춰 떨어지는 음악. 주인공이 좌절할 때는 음악이 처절하게 낮게 깔리고, 환희에 찼을 때는 화려한 오케스트라가 터져 나온다.
무엇보다 발끝으로 서서 공중으로 뛰어오르던 무용수의 모습에서, 나는 <태양의 서커스>를 보며 느꼈던 경이로운 환희를 다시금 맛보았다. 중력을 거스르는 비현실적 아름다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듯한 가벼운 움직임. 결국 인간이 내뿜는 에너지와 드라마틱함은 가장 본질적인 재미다.
M발레단은 2015년 한국발레의 정체성 구축을 모토로 창단되어,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오월바람>, <구미호> 등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 레퍼토리를 구축하며 흥행을 성공시킨 선두발레단이다. 2024년부터 M발레단은 소월아트홀의 공연장상주단체로, 발레의 활기가 가득 찬 성동구, 발레로 행복한 성동구민을 함께 만들어나가고 있다.
예술이 일상에 깃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릴 때 접하는 것’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고모의 손을 잡고 갔던 그날의 기억 덕분에 발레를 좋아하는 관객이 될 수 있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이 압도적인 시각 효과와 몸의 언어를 경험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공연장과 더 풍성한 무대들이 우리 곁에 머물기를 소망해 본다.
함께 읽으면 좋은 발레 용어
- 파드되(Pas de Deux): 발레의 꽃이라 불리는 남녀 주인공의 2인무로, 보통 '팡트(Pante, 서서 하는 동작)'와 '그랑 파드되'로 구성되어 두 무용수의 기술적 조화와 감정선을 보여준다.
- 발레 블랑(Ballet Blanc): '백색 발레'라는 뜻으로, <라 바야데르>나 <백조의 호수>처럼 여성 무용수들이 흰색 튀튀를 입고 군무를 추는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장면을 뜻한다.
- 브라보(Bravo) / 브라바(Brava) / 브라비(Bravi): 남성 무용수에게는 '브라보', 여성 무용수에게는 '브라바', 출연진 전체에게는 '브라비'라고 외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