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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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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관에서


 

2022년 들어 나는 영화관에 가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영화관에 거의 가지 않았다. OTT 서비스마저 거의 구독하지 않아서, 드물게 궁금한 영화 파일을 직접 사다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22년에 들어 영화관에 자주 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팬데믹 때문이었다. 텅텅 빈 극장, 몇 없는 직원들, 붉은 의자들에 혼자 앉아 막이 올라가길 기다리는 순간. 북적거리는 사람들 없이 혼자, 혹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과만 영화를 보는 것은 아주 특별했다.

 

광고가 끝나고 극장 안이 잠시 적막하고 어두워질 때,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영화관의 모양을 구경한다. 어둠 속에서 스크린 빛으로 희미하게 윤곽선을 띄는 좌석, 멀찍이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 혹은 빛이 새어 나오는 영사기. 그 순간마다 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당시 좋은 예술 영화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바빌론>, <애스터로이드 시티>, <추락의 해부>, <더 폴>등.

 

그때 유달리 내가 메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2023)은 인생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한다. 하야오의 ‘신작’을 영화관에서 처음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도 감격스러웠지만, 호오가 극심히 갈리는 와중에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떤 인물인지 가장 깊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평생 단 하나를 말하기 위해 살아간다. 모든 작품은 자신의 결핍, 고민, 죄악, 후회 등을 끊임없이 변주하며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바닥을 모르는 우물이라, 예술가가 평생을 다 바쳐 말해도 끝내 다 말할 수 없다. 결국 끝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말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창작이란 인간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개연성, 우연성, 핍진성을 지닌 채 세계가 조형되는 과정에서 언젠가 작품 스스로 예술가의 손을 떠나 홀로 생동하기도 한다. 고로 예술가의 작품은 마치 모녀 관계처럼, 그가 빚어낸 창조물인 동시에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별개로 존재하는 무수한 작품의 궤적을 통해, 끝내 실패한 예술가의 발화를 추측하고 해석하게 된다.


 

 

2. 나는 이렇게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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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2차 세계 대전 중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소년 마히토가 아버지와 함께 시골로 이사 후, 정체불명의 왜가리를 따라 현실과 수많은 세계가 공존하는 탑 안의 이세계로 들어가는 여정을 다룬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으로서 수많은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그의 작품론에 대해 수많은 발화가 오갔고, 거기에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반전주의’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작풍과 세계를 ‘반전주의’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하야오가 자신의 은퇴작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는 그의 전작들에 대한 오마주와 반복적인 표상이 산재해 있다. 여기엔 하야오의 분신과 같은 캐릭터가 크게 둘 등장하는데, 바로 주인공 ‘마히토’와 ‘큰할아버지’이다. 큰할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든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을 관철하며 살아온 구세대를 상징한다. 마히토는 처음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한 어린 미야자키 하야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세계를 만들어갈 신세대를 상징한다. 탑의 주인인 큰할아버지는 최상층까지 마히토가 도달하기를 기다린다. 자신이 일군 이 거대한 세계와 창조의 권능을 그에게 넘겨주기 위함이다.

 

마히토가 살고 있던 1940년대는 2차 대전으로 황폐한 세계이다. 전쟁으로 아버지의 비행기 공장은 호황이지만, 공습으로 어머니가 사망하며 소년은 상실과 혼란을 겪는다. 그런 마히토에게 이세계는 큰할아버지의 선택처럼 새롭고 깨끗한 세계를 만들어갈 기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험 속에서 마주한 탑의 광경 역시 바깥의 세계 못지 않게 엉망이다. 펠리컨들은 새 생명의 영혼인 와라와라를 잡아먹고,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드려 애쓰는 앵무새 군단들. 하야오는 홀로코스트와 같이 2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새들의 사회로 투영한다. 마침내 소년이 갈림길에 도달했을 때, 큰할아버지는 자신의 세계가 실패했음을 순순히 고백한다. 그리고 마히토에게 악의가 없는 순수한 돌로 새로운 세계를 쌓으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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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년은 자신에게도 악의가 있음을 고백하며, 이를 겸손히 거절한다. 세계가 무너져도 괜찮냐는 할아버지에게, 마히토는 그럼에도 ‘친구를 만드는 것’을 선택하겠다 말한다. 구세대들이 세계를 바꿀 수도 있다는 거대 이데올로기나, 작품이 현실을 변혁할 거란 기대를 품고 예술에 투신했다면 신세대는 다르다. 이제 우리는 세계가 얼마나 엉망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제 세계를 바꾸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이 엉망인 세계를 조금이나마 함께 나아가기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을 하야오는 충실히 이해한다. 이를 축복하며 앵무새 수장과 함께 붕괴하는 세계 너머로 사라짐은, 은퇴작을 내놓은 하야오 자신의 퇴장을 시사하기도 한다.

 

결국 이 영화는, 하야오가 쌓아온 모든 궤도를 스스로 리셋하는 동시에 일말의 희망을 내거는 결말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원령공주>(1997) 등 그의 전작들이 문명의 멸망 뒤 자연으로의 회귀를 택했고, 직전의 은퇴예정작 <바람이 분다>(2013)에서는 이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2023년, 여기에서야말로 하야오가 다음 세대를 명명하고 응시하며 열쇠를 건네준다. 그들이 하야오의 업을 계승하는 대신 새로운 결말로 나아갈 것임을 알면서도. 결국 이 발화는, 하야오의 따뜻한 물음이다.

 

“나는 이렇게 실패했다. 그러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3. 엉망이기에 아름다운


 

메타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결국, 작가 본인의 삶을 스스로 진실하게 조명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만나는 것. 그것이 예술 작품을 보는 이유이다. 픽션의 요소를 빌려와 픽션에 대해 말하는 것. 그 방식은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방식, 그것을 넘어 거기에서 비추어지는 삶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름다운 이유는, 영화를 통해 창작자로서 자신의 역사와 작품에 대해 스스로 냉정히 평하고 자신의 실패와 과오를 솔직히 토로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서 이 실패를 목도하고 나와, 여러 평을 찾아보았다. 호평보다는 오히려 불호평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위대한 예술가가, 자신의 삶에 대해 실패로 종지부를 찍었으니. 작품적인 완성도 역시 하야오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부족한 바 있다. 빈틈없이 완결된 스토리로 작품 외적인 완성도와 동시에, 메시지적인 내적 완성도도 충만한 작품을 하야오는 여럿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에 비해서라면 졸작에 해당한다.

 

초반부에는 명확한 세계와 스토리로 전개되지만, 탑의 세계를 중심으로 다뤄지면서 후반부 들어 전개는 관념적으로 변해가고, 인물들은 상징에 기대어 현학적인 대화를 나눈다. 또한 미야자키 감독과 그의 작품을 잘 알지 못한다면, 이해하기엔 다소 난해하다. 창작자의 행보로서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솔직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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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피했던 일, 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유쾌하고 밝고 긍정적인 소년상(의 작품)을 몇 편 만들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 자신이 정말 우울한 사람이었기에, 소년이라는 것은 좀 더 어둡고 여러 가지가 뒤엉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우리는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을 드러내자고. 달리기도 느리고,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내면에 가득 품고 있는 그런 주인공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몸을 발휘해 힘껏 이겨냈을 때, 비로소 그런 문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 미야자키 하야오, 아사히 신문 인터뷰 번역 中

 

 

이 인터뷰에서와 같이 하야오는 완벽한 작품을 만드는 대신 ‘자기자신’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기를 택했다. 하야오는 늘 그랬듯 완벽한 세계나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탑이 시사하듯, 그것은 무너질지도 모르는 세계이다. 대신 그는 끝내 피해왔던 것을 마주했다. 불완전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어둡고 여러 가지가 뒤엉켜 있는 것. 그는 여기서 전능한 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제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예술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다. 비록 미완이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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