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막을 내린 장파의 개인전 《고어데코 GoreDeco》가 국제갤러리 K1과 K2에서 열렸다.
거대한 캔버스로 둘러싸인 핑크 톤의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무언가에 포위된 느낌을 받았다. 보석과 조잡한 장식들로 뒤덮인 회화, 회화 위로 프린팅된 텍스트나 이미지, 또 화면 곳곳에 그려진 구멍들, 나를 압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전시를 본 후 시간이 지나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여성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고, 그 충격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소화하면서 장파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장파는 회화와 글을 매개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해체하며, 타자의 감각과 언어를 시각적으로 가시화한다. 그녀의 작업은 성삼위일체나 원근법처럼 인간의 이성을 상징해온 시각 체계를 비트는 동시에, 신성함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를 비천한 형상과 결합시켜 기존의 위계와 질서를 전복한다. 이러한 전략은 회화라는 고전적 매체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는 온라인을 채집지로 삼아 여성, 소수자, 남성성과 관련된 이미지와 언어를 수집하고 분류한다. 이러한 축적된 자료들은 회화의 고전적 어법과 서브컬처의 시각 언어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 타투나 혐오의 언어, 오해와 배제의 잔재들이 화면 위로 드러나며, 시청자는 사회 속 폭력과 억압의 감각을 전도된 시선으로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여성성’이라는 단어에서 무엇을 떠올리는가?
전통적으로 미술, 특히 회화에서 여성은 성녀나 비너스의 형상으로 그려져 왔다. 희고 윤기 나는 살결, 비단 같은 머릿결, 순수하면서도 은근한 에로티시즘은 남성적 응시가 만들어낸 규범이자 도상이었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여성을 통해 이 규범을 뒤집은 듯 보이지만, 여전히 여성의 몸을 관음의 대상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남성 중심적 재현의 언어 속에서 여성은 타자의 위치에 놓였고, 주체의 욕망에 따라 그 형태를 바꿔왔다.
장파의 회화는 이러한 시각 체계를 전복한다. 그녀의 화면 속 여성의 몸은 윤곽을 잃고 녹아내리거나 파편으로 흩어지며, 어떤 고정된 형태도 거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것이 ‘여성’이라고 인식하는가? 제목일 수도, 과장된 여성 신체의 일부일 수도, 핑크나 파스텔 톤의 색채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여성’을 여성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기준은 놀라울 만큼 적고 자의적이다.
얼마 전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이성애는 나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웠을까.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나는 왜 남성을 연애의 대상으로 선택했고, 그것을 단 한 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수많은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해 여성과 남성을 학습해왔던 것 아닐까? 그것이 학습이라는 자각조차 없이 말이다.
또한 학생 시절 미투 운동을 통해 처음 페미니즘에 닿았을 때, 나는 익숙했던 언어와 행동의 이면에서 차별과 혐오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느껴졌고, 나의 가치 체계도 흔들렸다. 지금도 그 흔들림은 계속되고 있고 그 단어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장파의 작업 역시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그녀는 우리가 무심히 소비해온 이미지들의 폭력적 구조를 드러내면서 익숙한 감각에 균열을 낸다. 그 균열 앞에서 우리는 더 많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