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파반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가끔 멈추어 서서서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그건 자신을 쉬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말을 쉬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너무 빨리 달려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했을까봐, 그에게 쫓아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각색한 영화 <파반느>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이종필 감독은 10년 가까이 이 영화를 준비하며 그 사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과 <탈주>(2024)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는 “사랑을 매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영화의 공식 소개말은 또 어떤가.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던 세 사람이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며 삶과 사랑을 마주하게 되는 영화’라고.
사랑, 청춘, 삶, 어떤 단어는 꼭 마구 펼쳐진 국어사전 속 단어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시간과 세월이 그득하게 쌓여있는 단어를 사용할 때면 ‘잘 해내야 한다’고 혹자는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뻔하디뻔한 감성팔이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라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노래해 왔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삶에 촘촘하고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삶과 사랑과 청춘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 쉽게 스쳐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다시 잃어버리는 것.

강록(문상민 분)은 늦깎이 스타가 된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미정(고아성 분)은 어머니를 여의고 아픈 아버지 밑에서 두 동생을 돌보며, 늘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됐다. 요한(변요한 분)은 백화점 사장 아들이니, 첩의 자식이니 하는 소문을 늘 달고 다닌다. 그들은 무료한 얼굴로 쨍한 여름, 백화점 지하에서 함께 일하게 된다.
남들에게 ‘보기 좋은’ 외모는 아니라고 묘사되는 미정을 마주한 강록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사랑은 마치 꼭 파반느 같다. 파반느란, 느린 박자의 춤곡을 뜻한다. 영화 속 강록은 “원하는 대학도 못 갔고, 섹스도 못 하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영화 밖에서 바라본 그들의 모습은 아주 느리고 우아한 박자의 사랑이다. 흔한 애정 표현을 나타낸 장면 하나 없이도 사랑을 연출해 냈다.
백화점 안, 일하는 청춘들의 열기는 치열하다. 복도나 계단 같은 아무 구석에 몰려 휴식을 취하는 청춘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열어대는 행사 덕에 바쁘게 움직이는 어린 손과 발 사이에서 강록과 미정은 마음을 나눴다. 요한은 과거 속 상처받은 자신을 반추하며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둘의 친구로서 ‘다리’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세 사람은 문득 ‘사랑은 환상일까’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에서 그들은 묻는다. “사랑이 뭐냐”고. 우습겠지만 에디터도 그런 걸 묻고 다녔을 때가 있었다. 궁금증만 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던 시절이었다. 순간은 지나고, 영원은 끝나서, 강록은 원하던 무용 전공으로 대학교에 들어간다. 더 이상 세 사람이 함께 일하던 백화점 지하 주차장 속 나날들은 없을 것이다. 삶의 분절은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랑이 뭐냐”고 묻는 요한에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말했던 강록은, 너무 사랑해서 떠나버린 미정을 찾아 다시 사랑을 약속하고 돌아오던 길에 죽었다. 뒤를 돌아보기 위해 말에서 내린 것일까?

영화는 네 계절을, 또다시 새로운 계절을 자꾸 흘려보내는 인물들의 옆모습을 담았다. 잠시 자신을 잠식하려고 했던 과거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시도했던 요한이 재활을 끝내고 자신의 꿈을 이루며 5년이 지났다. 미정은 백화점 지하에서 파주로, 파주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그럴듯한 직장과 친구, 삶을 얻었다. 여전히 셋이 자주 가던 호프집은 그대로지만, 강록은 없다. 계절은 그렇게 흐른다.
손때 탄 국어사전 속 말 같다는 건, 우리가 지겹도록 경험하고 지나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를 시청하는 우리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건 없다거나 그래도 사랑이 어쩌구, 삶은 어쩌구, 하는 뻔한 수식어구를 빼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단히 이어지는 사계절 내내 느린 춤을 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 사랑, 청춘, 또 영원, 뻔한 말이면 또 어떤가. 잠시 사랑이 다녀간, 잠시 청춘이 다녀간, 잠시 빛을 비췄던 얼굴은 우리가 익히 아는 얼굴이다. 세 사람의, 어쩌면 그 이상의 사랑 영화다. 그걸 지켜본 것만으로 뿌듯해지는 밤이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